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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보기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난 편을 안 읽은 분은 먼저 혹한기훈련 上편, 혹한기훈련 中편부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역사상 최고의 낙오자를 배출해낸 눈 덮인 명지령을 어렵사리 넘은 우리들은 다시 힘을 내어 행군을 시작하였다. 명지령을 내려오고는 희소식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전원 차량으로 이동하다는 내용이었다. 행군하다가 차량을 탑승할 수 있다니? 순간 믿을 수 없었지만,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우리들은 차량을 탑승한다는 마음에 들떠 있었다.
"이병장님! 저희 차량이동하는 겁니까?"
"그러게! 신이 우리를 구원하는가보다!"
"오오 대박이지 말입니다!"
그렇게 눈 덮인 산길을 힘차게 걸어갔다. 아직 길이 좁기 때문에 우리를 태울 군용트럭이 다닐 수 없었다. 지루한 산길을 2시간 가량 더 걷고 나서야 다소 넓은 도로로 진입하였다. 도로에는 각종 군용차량들이 쉴 새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K-4를 실은 지프와 애벌레처럼 생긴 지원중대 차량, 지휘관 차량 등 그 안에 탑승하고 있는 군인들을 보자 한없이 부럽기만 하였다.
하지만 부러움도 잠시, 이제 곧 우리를 태울 트럭도 올 거 같았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는 부소대장의 무전기 교신에 집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후방에서 굉음을 울리며 군용트럭 수십여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우리들은 신이 나서 환호하였다.
"오오 구세주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줄 지어 달려오는 수십여대의 군용차량은 보기만 하여도 위풍당당하였다. 특히, 명지령에서 제대로 낙오하였던 신병들은 마치 자신들이 축복받은 거 마냥, 행복해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차량 탑승과 동시에 낙오에 대한 후폭풍이 있을 것이다. 하긴 뭐, 그래도 좋다. 걷지만 않을 수 있다면, 그깟 갈굼따윈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릴테니깐 말이다.
차량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우리는 도로 양 옆으로 물러나서 당장이라도 탑승할 기세로 대기하였다. 차량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엇! 저 녀석들은?"
수십여대의 군용트럭은 우리를 보란듯이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뒷 좌석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빼곡히 탑승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들은 바로 우리의 대항군이었다. 명색이 훈련이기 때문에 가상의 적이 필요하였다. 대항군은 우리가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굳이 행군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예전에 대항군에 관한 글을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2009/05/11 - [가츠의 군대이야기] - 가츠의 군대이야기, 7사단대항군
"신은 우리를 버렸어!"
"정녕 끝난 것인가?"
하긴 이기자부대 소총수에게 차량이동이라니,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 우리들이 한심하였다. 그래도 잠시나마 희망을 하였던 탓일까? 허탈감이 크게 밀려왔다. 어깨에 메고 있는 군장과 K-3가 더욱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평지라서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추수가 끝난 논밭에는 사람이 밟지 않은 뽀얀 눈이 쌓여 있었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쌓인 눈을 우리에게 날려 주었다. 차가운 눈가루가 얼굴에 닿자, 정신이 맑아졌다. 명지령을 넘으면서 흘린 땀을 흠뻑 머금은 전투복은 이미 얼어 있었다.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이제 추위는 적응되었다.
"왠지 낯익은 곳인데!"
앞서가던 이병장이 중얼거리며 혼잣말을 하였다. 나는 전혀 이 곳이 어디인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6개월 선임이었던 이병장은 일전에 한번 와봤던 곳인가보다. 본인이 직접 행군하였던 코스는 좀처럼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나 또한, 눈을 감으면 당시의 풍경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나의 세포들이 지금 위험하다고 알리는구나!"
"무슨 말입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이등병 때 와봤던 곳이야! 죽을 뻔했지! 아니 죽었어!"
"................"
"조금만 더 가면 진넘이고개가 나올 거다!"
진넘이고개? 이번 훈련은 모든 곳이 생소하였다. 명지령도 처음이었고, 지금 걸어가고 있는 행군로도 처음이었다. 게다가 진넘이고개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병장은 곧, 진넘이 고개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좀 전에 넘은 명지령이 무척 긴 오르막 코스라면 진넘이고개는 매우 짧지만, 높이는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말인즉슨, 미칠듯한 경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굵고 짧게 한방에 영혼을 불태워 버리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시간은 오후 5시가 다 되어갔다. 곧 저녁을 먹어야 하고, 주둔지 편성도 하여야만 한다. 더이상의 코스는 불가능할 것이라는게 나의 예상이었다. 그냥 지나쳐가겠지? 시간을 확인한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나선형의 긴 도로는 앞서가는 전우들의 모습이 한 눈에 보였다.
"바로 저기다!"
이병장은 우측에 있는 높은 산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킨 지점에는 당장이라도 우리를 잡아먹을 듯한 무시무시한 포스를 풍기는 고산이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잽싸게 전방에 걸어가는 전우들을 바라보았다. 곧 갈림길이 있었다. 그대로 직진하면 계속 평지를 향해 갈 것이고, 우측으로 진입한다면 어김없이 진넘이고개를 넘어야 한다. 아니 나 뿐만이 아니었다. 소대원 전원의 시선이 전방에 있는 8중대 인원들을 바라 보고 있었다.
8중대는 화기중대이다 보니, 81mm박격포와 90mm무반동총을 가지고 행군했다. 포신이 무척 길기 때문에 멀리서도 그들이 잘 보였다. 그들의 어깨에 메어 있는 포신이 대롱대롱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눈동자도 포신의 진행방향에 따라 열심히 움직였다.
"제발 직진하자!"
"신이시여! 우리를 두번 버리지 마소서!"
전방의 8중대 인원들이 갈림길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병장들은 큰소리로 직진을 연호하였고, 밥 안되는 후임들은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아아..."
순간, 소대원들의 입에서는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앞서가던 8중대 인원들은 갈림길에서 한 치의 망설임없이 우측으로 진입하였다. 결국 고개를 넘는 것이다. 더 이상 슬퍼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갈림길이 가까워지자, 엄청난 경사의 고개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미 고개를 올라가는 전우들의 뒷 모습은 마치 공중에 떠있는 거 마냥 높아만 보였다. 그 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땅에 신은 존재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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