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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보기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난 편을 안 읽은 분은 먼저 혹한기훈련 上편부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드디어 명지령 입구에 도착하였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경사가 장난이 아니었다. 굽이 굽이 돌아가는 오르막길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유격복귀행군을 하며 헐떡 고개를 넘었을 때, 대대ATT를 뛰며 어깨탈골이 되었을 때, KCTC훈련를 뛰며 탱크를 잡았을 때, 호국훈련을 뛰며 헬기를 탔을 때 등 힘들었던 훈련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느낌이 좋지 않아!"
송곳같은 칼바람이 나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잠시후, 점심을 먹고 간다며 소대별로 소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정오가 다 되었다. 분대별로 반합봉지에 밥과 반찬을 배식하고는 모여 앉았다. 3명이서 하나의 봉지에 담긴 밥을 숟가락으로 열심히 퍼먹었다. 주둔지에서 식사를 할 때는 자율배식이라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훈련 중에는 정해진 양을 나눠먹어야 한다. 무한정 식사를 배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명지령의 경사를 본 탓일까? 하나같이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애써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띄울려고 해보았지만 이미 일, 이등병들은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할 수 있다는 자기암시를 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나 또한, 방심할 처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K-3의 압박은 실로 어마어마하였다. 게다가 훈련 바로 전주에 K-3사수로 보직이 변경되었기에, 나에게는 K-3와 함께하는 첫 행군이었다.
"다들 힘내! 여기만 넘으면 된다! 그 다음부터는 죄다 평지야!"
고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날 우리는 명지령을 넘고도 2개의 산을 더 넘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말이다. 물론, 고참들은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오히려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더 불안하였다. 식사를 하며 어느정도 휴식을 취한 우리들은 출발을 하기위해 집결하였다.
힘찬 함성과 함께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앞서가는 제대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이윽고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사고라도 난 것일까?
"의무병! 의무병!"
의무병을 찾는 소리가 들려온다. 곧 이어, 후방에 있던 앰블에서 군의관과 의무병이 열심히 뛰어올라 오고 있었다. 보통 행군을 할때, 앰블이 같이 이동하지만, 현재 이 곳은 차량이 다닐만한 길이 아니었다. 다들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앞서가던 중대의 병사 한명이 미끄러져서 다쳤다고 하였다. 잠시후, 무전기에서 중대장의 음성이 들렸다.
"당소 찰리장!, 현 위치부터 결빙지역이구나!"
겨울내내 내린 눈이 녹았다가 얼기를 반복하며, 경사로 전체가 스케이트장처럼 꽁꽁 얼어있었다.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고개를 돌자, 다친 병사가 보였다. 가득이나 무거운 군장을 멘 상태에서 심하게 미끄러져서 그런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하였다. 군의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친 부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를 지나쳐 갈 때, 나의 마음 속의 숨어있는 작은 악마를 느꼈다. 쓰러져 있는 그를 보며, 내심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행군을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병원으로 후송되어 입원실에서 실컷 잠을 자며 따뜻하게 보낼테니 말이다. 그만큼 너무 힘들었다.
곧 이어, 재차 무전이 날아왔다. 아이젠을 착용하라는 지시였다. 아이젠이라 함은, 신발바닥에 부착하는 등산도구로, 빙판길에서 미끄러움을 방지해준다. 그러나 군용 아이젠은 착용감이 상당히 불편하다. 게다가 자신의 몸무게에다가 군장무게까지 더해져서 발바닥이 무척 아팠다.
사실, 그동안 가지고만 다녔지 직접 착용한 적은 없었다. 행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괜히 사소한 것 하나라도 신경이 쓰이면 금새 지쳐버린다. 역시, 낙오자가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아니 신병들은 전원 낙오하였다. 간부들과 분대장들은 바빠지기 하였다. 보통 많아봐야 1, 2명정도 낙오하는데, 지금은 이등병, 일병할 것 없이 죄다 나가떨어졌다.
우리 분대 막내인 김이병은 부소대장 손에 이끌러 오고 있었고, 혼자 바리바리 챙겨입었던 이일병은 분대장이 쳥겨오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이일병은 아주 제대로 갈굼먹고 있다. 아마 그에게는 최악의 훈련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앞서 가던, 이이병까지 쳐지고 있다. 훗날 우리들은 그 날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 곳은 신병들의 무덤이었다!"
평소같으면 낙오하는 병사들에게 화이팅을 하며 격려를 해주겠지만, 당장 나도 죽을 거 같았다. 아이젠을 신은 발바닥은 구멍이 뚫리는 거 같았고,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은 당장이라도 터질 거 같았다. K-3를 메고있는 어깨는 이미 축 쳐져있었고, 목 근육까지 아려왔다. 문득 슬퍼졌다. 나는 왜 이 곳에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전생에 나라를 팔기라도 한 매국노였나?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깐, 더이상 생각할 힘도 없었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하였고, 거친 호흡은 이미 정점에 다다랐다. 이제 나도 발걸음 뗄 수 없었다. 이렇게 낙오하는구나. 그 순간, 공포탄 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한 무전이 날아왔다.
"전방에 적 특작조 출현! 전원 소산하라!"
살았다! 상황이 걸리면서 행군이 중지되었다. 나는 잽싸게 숲 속으로 들어가서 그 자리에 엎드렸다. K-3 기관총을 거치하고는 전방을 향해 조준하였다. 그제서야 가뿐 호흡을 정리하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나의 부사수인 배일병이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은 기총부사수이기 때문에 기총사수인 나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자리에 일어서서 그의 행방을 찾기 시작하였다.
절벽 쪽에서 배일병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저 녀석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거는 아니겠지? 아무리 힘들다고 저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려고? 자세히 보니 무릅을 꿇고, 연신 두 손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이슬람교도처럼 말이다. 낯선 모습에 나는 당황하였다.
"골 때리는데?"
나는 배일병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배일병은 양손으로 바닥에 있는 눈을 끌어모아 자신의 얼굴에 신나게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집어서 열심히 먹었다.
"야이 또라이야! 머하는 겨!"
"ㅇ런ㅇ롸ㅓㄴ올레!"
"아낰ㅋㅋㅋㅋㅋㅋㅋ"
훗날, 배일병은 병장이 되어서도, 유격조교가 되어서도, 그 날의 사건때문에 두고두고 놀림을 받았다. 정작 본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발뺌하였지만, 나는 보았다. 소대원들도 보았다. 명지령도 보았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도 보았다.
사랑한다 배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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