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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난 편을 안 읽은 분은 먼저 취사지원 上편부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점심으로 나온 비빔밥 덕분에, 우리 분대원들은 쉴 틈도 없이 설거지만 하고 있었다. 식판에 짓눌린 밥알과 고추장으로 인해 설거지는 더디기만 하였다. 외모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분대장인 박병장은 예리한 시선으로 식판을 하나하나 검사하고 있었다.
"다시! 제대로 안해!"
수북히 쌓인 식판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침에 취사장으로 투입될 때만 하여도, 행복한 상상을 하며 내려왔었는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얼마나 설거지를 하였을까? 이제는 내 의지가 상관없이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나의 두 손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도 식판을 들고, 닦고, 옆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어느새 우리들은 아무도 말문을 열지 않았고, 표정도 사라졌다. 그저 묵묵히 식판을 닦고 또 닦았다. 아침에 내무실에서 들고 온 오디오만이 신나게 CD를 돌리고 있었다. 오디오 스피커에는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인권 아저씨의 목소리만이 구슬프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다시 돌고, 돌고, 돌고~♪"
순간, 박병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 CD 누가 가지고 왔어?"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독특한 음악세계를 가진 이상병이 특유의 선한 웃음으로 활짝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러자 박병장은 손에 묻은 물기를 이병장에게 빛의 속도로 뿌리며 말하였다.
"눈을 감고 상상을 해봐! 우리가 완전군장을 메고, 산길을 오르고 있어! 한걸음 한걸음 발을 뗄 때마다 허벅지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턱 막혀! 근데 옆에서 차가 한 대 지나가! 차 속에서 패닉의 달팽이가 울려퍼지고 있어! 기분이 어떨 것 같냐?
"........."
"지금 그거랑 이거랑 뭐가 달라! 진짜 너의 두뇌를 돌리고 싶다!"
짬이 안되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나와 심이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박병장은 쥬얼리 CD로 교체하였고, 곧, 오디오에서는 슈퍼스타가 우리를 응원해주었다. 쥬얼리의 치어리딩 덕분일까? 설거지하는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설거지만 마치고 나면, 저녁 준비할 때까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이 절로 났다.
잠시후, 끝날 거 같지 않던, 설거지가 모두 끝이 났다. 깨끗이 닦은 식판을 건조기에 차곡차곡 끼어 놓고는 스위치를 올렸다. 뿌듯한 순간이었다.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워 하는 찰나, 주임원사와 취사반장이 취사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뭐가 불만인지 취사반장을 신나게 갈구기 시작하였다.
대대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당연히 대대장이다. 그리고 2인자는? 물론 계급으로 한다면 장교인 작전장교이겠지만, 실상은 주임원사이다. 이미 짬밥으로만 따져도 족히 수십년은 근무하였기에, 일단 외모부터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풍긴다.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지 아니한가? 갓 임관한 새파란 소위가 주임원사에게 경례를 안한다며, 스스로 자멸하는 거 말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고보면 주임원사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도 울고 갈 정도로 뛰어난 디자인 감각이 있다.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도 엣지있는 분수나 화단을 뚝딱 디자인하고는 만들라고 지시한다. 그러면 언제나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자리에 디자인한 건물이 떡하니 생긴다.
"불...불안한데?"
아니나 다를까? 취사반장은 취사병과 박병장을 부르고는 이것저것 지시를 하기 시작하였다. 박병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제 쉬나 싶었는데, 대대적인 취사장 청소를 해야된다고 하였다. 아나 하필 오늘 주임원사가 취사장에 와서 이 난리블루스를 치는 걸까?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하다못해 어제 왔어도 됬는데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쉬지도 못하고 다시 취사장 광내기에 돌입하였다. 나와 심이병은 일단 쌓인 잔반처리 임무를 부여받았다. 잔반통에 담긴 잔반을 들고는 취사장 밖으로 가지고 갔다. 아무리 식욕이 왕성한 군인이라지만, 매 끼마다 많은 양의 잔반이 나온다. 밥과 국, 반찬들로 한데 뒤섞여 있기 때문에 보기 안좋고, 냄새도 고약하다.
당연히 잔반처리는 막내인 나와 심이병의 몫이었다. 사람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잔반통을 낑낑대며 들었다. 자 그럼 군부대에서는 이 많은 잔반을 어떻게 처리할까? 사회에서라면,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지정된 장소에 놔두면, 알아서 수거해가지만, 퐁퐁 살 돈도 없는 부대에서 값비싼 쓰레기 봉투가 있을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땅을 파서 묻을 수도 없다. 하루 이틀은 가능하겠지만, 수십년간 매일같이 묻었다고 생각해보자.
악취는 둘째치고, 아마 우리 부대원들 수보다 멧돼지의 수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 부대는 북한군이 아니라 멧돼지의 습격으로 전멸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사한 것을 보아서는 해결책이 있는가보다.
"심이병님! 이거 어디다가 버립니까?"
"놔두면 돼! 조금 있으면 짬아저씨가 와서 가지고 간다!"
"짬아저씨 말입니까?"
"거 있잖아! 존내 이상한 트럭타고 오는 아저씨!"
그랬다! 중국에서나 볼 법한 특이한 트럭을 타고 매일같이 부대 안으로 들어오시는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부대를 돌며, 남은 잔반을 싸그리 가지고 가셨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근처에서 흑돼지 농가를 운영하시는 분이라고 하셨다. 부대에서는 음식물을 처리할 수 있어서 좋고, 짬아저씨는 키우는 돼지들에게 사료 대신 먹이를 줄 수 있어서 좋았다. 윈윈전략이었다.
잠시후, 특유의 트럭 엔진소리를 내며, 짬아저씨의 트럭이 부대로 들어왔다. 곧, 취사장 앞에 트럭을 세우고는 아저씨가 내렸다. 땅땅한 체격에 할아버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연륜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나와 심이병은 잔반통을 들고는 트럭에 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잔반이 많이 나와서였을까? 잔반통은 넘치기 직전이었고, 좀처럼 높이 들 수가 없었다.
"젊은 녀석들이 왜 이리 힘을 못써!"
'아나! 존내 무겁다구요! 안 들어보셨으면 말을 하지 말아요!'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하며 들어 올릴려고 끙끙거렸다. 그러나 트럭의 짐칸까지 올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천상 취사장 안에서 쉬고 있는 고참을 불러야 할 형편이었다. 결국 포기하고 취사장 안으로 뛰어 갈려는 찰나, 뒷짐지고 서있던 짬아저씨가 말하였다.
"마 어디가노! 이리 온나! 같이 들어보자!"
"헐! 이거 겁나 무거워요! 아저씨 허리 다쳐요! 제가 고참 불러올게요!"
"마 됐다! 이거 하나 드는데, 덩치는 산 만한 것들이 쯧쯧!"
"............"
나는 미심쩍었지만 일단 같이 들어보기로 하였다. 짬아저씨의 가세로 꿈쩍도 하지 않던 잔반통이 가뿐하게 들리더니 트럭에 실을 수 있었다. 짬아저씨는 체구와는 달리 힘이 장사였다. 나와 심이병은 놀란 눈으로 짬아저씨를 바라 보았다. 그런 우리를 뒤로 한 채 잠시 트럭을 세워두고는 어디론가 걸어가셨다.
민간인인데, 마음대로 부대를 돌아다녀도 되나 싶었지만, 매일같이 오시는 분이니깐,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와 심이병 취사장 안,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다들 잠시 쉬고 있었다. 박병장은 음료수를 뽑아오라며 돈을 주었고, 우리는 음료수 자판기로 가서 음료수를 뽑았다. 담배를 피지 않는 심이병을 뒤로 한 채, 나는 조심스레 담배 한개비를 꺼내서는 입에 물었다.
"아나! 하필 오늘 주임원사님이 와서 난리치다니 운도 지지리도 없지 말입니다?"
"그러게! 암튼 내 인생에 도움이 안돼! 작업은 작업대로 존내 시키고!"
"아나! 누가 탈영안하나? 한번 사고나야지 정신차리지 말입니다!"
"가츠! 너라면 할 수 있어! 나 못 본걸로 할테니, 저기 담을 뛰어 넘도록!"
".............."
그렇게 나와 심이병은 신나게 주임원사 뒷담화를 하였다. 잠시후 멀리서 짬아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는 신나게 뒷담화를 하였던 주임원사도 같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잽싸게 담배를 끄고는 부동자세로 경례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걸어오는 그림이 영 이상하였다.
천하의 주임원사가 연신 짬아저씨에게 쩔쩔매며 애교를 부리고 있는게 아닌가? 물론 연배는 짬아저씨가 좀 더 있어보이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귀엽게 애교를 부릴 필요는 없어보이는데 말이다. 그것도 주임원사가 말이다.
잠시후, 짬아저씨는 주임원사의 배웅을 받으며, 유유히 트럭을 타고 부대를 벗어났다. 나와 심이병은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취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들은 음료수를 들고는 고참들에게 갔다. 그리고는 방금 본 이야기를 하였더니, 박병장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 짬아저씨의 정체를 모르는구나?"
"네 그렇습니다!"
"짬아저씨는 전 사단주임원사님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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