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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보기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난 편을 안 읽은 분은 먼저 첫사랑 上편부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윤상병의 첩보를 입수한 나는 내무실로 들어갔다. 소대원들은 작업을 마치고 내무실 정리에 분주하였다. 자욱한 먼지에 손사래 치며 정일병을 찾았다.
"정일병 어디갔냐?"
"화장실에서 걸레 빨고 있습니다!"
화장실로 들어가보니, 한 쪽 구석에 쭈그려 앉아 걸레를 빨고 있는 정일병의 모습이 보였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인데 더 초라해보였다. 문득 그의 뒷모습에서 1년전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나 또한 저 자리에 쭈그려 앉아서 걸레를 빨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원망하며 있는 힘껏 말이다.
"정일병! 커피나 한 잔 하러가자!"
갑작스런 나의 호출에 놀란 듯, 정일병은 잔뜩 긴장한 채로 나를 따라왔다. 사슴같은 그의 눈망울은 행여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 연신 껌뻑거리고 있었다. 사실 분대장과의 일대일 면담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정일병의 허리를 감싸안은채 커피자판기로 걸어갔다.
잠시후, 우리는 한 손에 따뜻한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정일병은 나의 눈치를 보는라 잔뜩 긴장하여 있었다.
"담배나 한대 피자! 자!"
"감사합니다!"
"요즘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임마! 이마에 죽고 싶습니다! 떡하니 적혀있구만!"
"............"
"여자 문제지?"
"헛!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일병은 나의 질문에 진심으로 놀란 듯 하였다. 이제 나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정일병은 나를 능력자인 거 마냥, 우러러 보고 있었다. 그렇게 담배를 한 대 피울 동안, 우리는 말없이 하늘만 바라 보았다. 높디 높은 가을 하늘에는 뜨거운 태양만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정일병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고, 감정이 복받친 정일병은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금새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첫사랑이야?"
"네 그렇습니다!"
"젠장 이럴 땐 족발에 소주 한 잔 하면서 상담해야되는데! 우울하네!"
족발이야기에 순간 정일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상하지마! 다시 정일병을 붙잡고 본격적인 카운슬링에 들어갔다. 사실 좋은 말은 누구나 쉽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허울 좋은 말들은 한 때다. 돌아서면 다시 우울해지는 법이다.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나의 진심을 꺼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정일병을 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안녕 내이름은 가츠야, 내 얘기 한 번 들어볼래?"
20대 초반의 풋풋한 첫사랑, 많은 남자들이 첫사랑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왜 유독 첫사랑만 쉽사리 잊지 못하는 걸까? 그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기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싶다. 입대와 동시에 모든 환경이 급변하다. 호시탐탐 갈굴거리를 찾고 있는 무서운 고참들 틈바구니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내다보면. 그제서야 평소 자신이 받아온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녀는 천사였어!"
온갖 궂은 일을 하다보면, 그녀에게 못해 준 것들이 무수히 떠오르게 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비하면 너무나 손 쉬운 일인데 그거 하나 못해주다니, 아쉬움의 연속이다. 유난히 걷는 것을 좋아하던 그녀와 걷는 것을 무진장 싫어하였던 나, 나랑 산책하는게 소원이라는 그녀를 온갖 변명으로 매몰차게 거절하기 일쑤였다.
그런 내가 지금 강원도 산속에서 완전군장을 메고 수십킬로가 넘는 행군을 밥먹듯이 하고 있다. 그럴때마다 그녀가 떠올랐다. 이건 분명히 산책 안해줘서 벌 받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녀는 진정 주술사였단 말인가?
전역하면 해달라는대로 다해줘야겠다. 지금 고참들에게 하는 거 십분의 일만 하여도 일등 남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참의 눈만 봐도 원하는 것을 바로 준비할 수 있는데,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언들 못하겠는가? 산책? 이상태라면 마라톤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운명은 나에게 더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갑작스런 이별통보에 안그래도 힘들었던 군대는 지옥이 되버렸다. 내 키만한 부대 담장은 63빌딩보다도 높아 보였다. 청원휴가를 얻어서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현실은 나를 더욱더 나락으로만 빠뜨렸다.
당시, 옆 중대에서 나처럼 여자친구 때문에 청원휴가를 나간 전우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영원히 부대로 복귀하지 않았던터라, 나의 청원휴가서는 한낱 쓸데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였다. 그렇게 나는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하고, 군복을 입은 채 부대에 갇혀 있었다.
"아아 나까지 우울해졌어! 담배나 한대 더 피자!"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니가 말하는 괜찮다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죽고 싶진 않아!"
".........."
"OO아! 저기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을 봐봐!"
정일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떠있는 태양, 정일병은 이내 눈이 부신듯 시선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나의 명령인지라 계속 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게 어디 인간의 뜻대로 되겠는가?
"어때? 눈 부셔서 똑바로 못보겠지?"
"네!"
"이게 지금 너의 상황이야! 넌 지금 뜨거운 사막에 외로이 혼자 서있는거야! 강렬한 태양은 연신 널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지! 이대로라면 어떻게 되겠어?"
"죽습니다!"
"그래 이대로라면 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채 죽을거야! 하지만 자세히 보면 혼자가 아니야! 너 주위에는 항상 너를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그곳이 설령 군대일지라도!"
"이제 내가 너의 구름이 되어줄게!"
나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들은 정일병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내 앞에서 흐느끼는 그를 보며 나는 말없이 등을 두들겨 주었다. 1년전 나도 이렇게 울었다. 이미 전역하여 내 곁을 떠난 박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고참들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나의 든든한 구름이 되어 주었다. 때로는 먹구름일 때도 있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한여름의 시원한 소나기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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