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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보기
오늘은 병장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때는 바야흐로 06년 6월, 분대장 교육대에서 사단장 표창장을 받은 나는 4박 5일의 포상휴가를 받았다. 휴가기간이 대대ATT랑 겹치는 바람에 못 나가는 줄 알았지만, 역시 사단장 포상휴가증은 전능했다. 훈련 준비로 여념이 없는 소대장과 분대원들을 뒤로 한 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휴가자가 되어 부대를 벗어났다.
1년차 정기휴가 이후 8개월 만에 휴가를 나간 것이다. 240일 동안 사회는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버스터미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TV에서나 보던 최신 유행패션을 직접 보니 신기했다.
'누나들 너무 과감한 거 아냐?’
한껏 과감해진 그녀들의 패션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군인들은 치마 입은 사람만 봐도 떨린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다. 버스에서 먹을 간식을 사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안에서는 갓 백일휴가를 나온 이등병들이 신나게 먹을거리를 고르고 있었다.
‘쯧쯧! 미래가 안 보이는구나! 나 같으면 자살한다."
측은한 이등병들을 뒤로하고 과자와 음료수, 잡지를 들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얼마예요?”
“7400원이요!”
“잘못 들었어... 아! 네?”
명색이 분대장 견장을 차고 이런 이등병 같은 실수를 하다니. 정말 쪽팔린다. 나는 물건을 챙기고는 서둘러 편의점을 나왔다. 왠지 저 녀석들, 비웃는 거 같애.....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자 어느덧 시간은 저녁이 다 되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큰 아들을 반갑게 껴안아주셨다. 따뜻한 어머니의 체온, 비로소 집으로 온 게 실감났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진수성찬을 차려주셨고 나는 숨도 안 쉬고 게걸스럽게 먹기만 했다. 마침 그날은 2006년 독일월드컵 한국과 스위스의 시합이 있는 날이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친구들에게 연락도 하지 못했다. 나는 문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문혁, 나야 가츠!”
“어, 너 어디야? 탈영한 거 아니지? 나 엮지 마라.”
“아니야 포상휴가 받았다구!”
“잘 됐네. 이따가 애들하고 다 모여서 월드컵경기장 가기로 했어!”
오호 월드컵경기장이라. 사람들도 바글바글하겠지? 게다가 TV에서나 보던 태극기 누나들도 있을 거야. 나는 급 흥분했고,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사놓은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찾아 입었다. 경기장은 이미 응원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문혁이는 센스 있게 여자친구들도 불렀다. 이런 거 너무 좋아!
우리는 치킨과 맥주를 먹으면서 신나게 응원했다. 문득 부대가 생각났다. 아마 지금 내 동기인 박상병이 당직근무를 서고 있을 것이다.
“정보통신보안 5중대 당직병 상병 박상만입니다!”
“여보세요, 거기 치킨 집 아니에요?”
“통신보안! 잘못 거셨습니다.”
“앜ㅋㅋㅋ 나야 가츠! 아니 지금 월드컵 경기가 한창인데 뭐하는 짓이야? 근무라니? 미친 거 아냐?”
“꺼져!”
나는 동기 녀석을 실컷 놀리고는 다시 응원에 열중했다. 사실 전광판 모니터보다는 지나가는 태극기 누나들을 보는데 더 열심이었다. 내 불순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결국 우리나라는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회에 있다는 만족감 때문인지 월드컵 탈락마저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정신없이 놀다보니 어느새 복귀 하루 전이다. 휴가 나오면 시간이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이건 완전 반칙이야! 부대에 있을 때보다 수십 배는 빨리 가는 거 같다. 서울에 사는 선배가 복귀 전날 올라와서 같이 놀다가 곧바로 부대로 복귀하라고 했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문득 백일휴가 때가 생각이 난다. 꼬질꼬질한 이등병 전투모를 착용하고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서울로 갔다. 참 내가 생각해 봐도 없어 보이고 불쌍해 보였을 것이다. 비록 지금도 군인이지만 군인들의 로망인 분대장이다.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사단장 표창을 받아 휴가를 나왔다고 자랑할 그녀는 이제 내 곁에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헤어지고는 서울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입성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언제쯤이면 말끔히 잊을 수 있을까? 역시 해답은 전역만이 살 길인 거 같다. 이대로는 영영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선배를 만나 식사를 하고 대학로로 연극을 보러 갔다. 아무리 군인이라지만 문화생활은 좀 해줘야 되는 거 아니겠는가? 선배와 나는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즐겁게 관람했다. 한층 업 된 우리들은 술집으로 들어가 술잔을 기울였다. 선배는 이제 군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마무리하고 나오라며 격려해 주었다.
“가츠! 이제 좋은데 가야지? 형이 쏜다!”
“하하 좋은 데는 무슨 됐어요!”
“군바리 주제에 지금 튕기는 거야? 덜 굶주렸구나?"
"안 돼요! 요즘 단속 얼마나 심한데. 누구 영창 보내려고? 술이나 먹어요!“
당시에 성매매특별법으로 단속이 엄청 심하기는 했다. 부대에서도 휴가자들에게 불법유흥업소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실, 신체 건강한 남자가 왜 그런 곳을 안 가고 싶겠는가? 그것도 더욱이 군인 주제에 말이다. 그러나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지금 선배와 술을 마시고 있는 이곳 대학로는 그녀와의 추억이 참 많은 곳이었다. 대학로에서 걸어서 20분이면 그녀가 사는 집이 있다. 사실 서울로 올라올 때만 해도 그녀의 기억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녀와의 소중한 추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분명히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창밖을 바라보니 많은 연인들이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 옥신각신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저들처럼 그녀와 정답게 이 거리를 거닐곤 했다. 저기서 케밥을 먹었고 떡볶이도 먹었다. 대학로의 모습은 입대 전과 비교하여 변한 게 없는데 유독 내 신세만 변한 것 같아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인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이미 지하철은 끊겼지만 거리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거리의 인파를 헤치며 걷다 보니 낯익은 곳이 등장했다. 마로니에 공원
그녀가 유난히 좋아하던 곳이다. 데이트를 하던 우리는 항상 마로니에 공원에 들러서 거리 공연을 구경하곤 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공원에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걷다가 지친 우리는 아무 데나 주저앉아 그들의 연주를 들었다. 경쾌한 음악이 공원을 울려 퍼지지만 내 귓가에는 슬프디 슬픈 멜로디가 되어 파고든다.
“형!”
“왜 임마.”
“왜 못 잊는 걸까?”
“못난 놈! 아직도 못 잊었나? 너 싫다고 떠난 년, 뭐가 아쉽다고. 좋은 여자 쌔고 쌨어!”
“근데 형은 여자친구 없잖아!”
“음... 암튼 전역하면 형이 예쁘고 어린 애로 해줄게”
“꼭 전역하고? 지금 말고?”
“꼭 전역하고!”
마음 같아선 그녀의 집까지 내달리고 싶었지만, 이미 내게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아니 용기가 없었다. 아직 군인인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당장 몇 시간 후면 다시 강원도 깊은 산속으로 돌아가야 되는 신세인데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그녀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본 그녀는 변함없이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가츠야!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흑...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바보! 난 항상 여기 있었는데! 일어나 감기 걸리겠다!”
그녀가 연신 내 볼을 만져주며 나를 일으켜세웠다. 나는 너무 기뻐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나의 몸을 녹여 주었다. 그녀의 숨결과 체온이 고스란히 나에게 느껴졌다. 근데 그녀도 술을 마시고 온걸까? 진한 알콤냄새가 나의 코 끝을 자극하였다.
“야이 임마! 좋은 데 안 간다며? 갑자기 왜 이래 징그럽게!”
달콤했던 한여름밤의 꿈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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