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서 동으로 동으로!"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역사는 자그마치 6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최강국이라 불리우는 미국의 역사가 이제 겨우 200여년을 넘어가고 있다는 점과 비교한다면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처럼 서울의 유구한 역사가 말해주듯 도심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반세기 넘게 우리나라를 지켜온 다섯 궁궐이 위치하고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궐이라고 불리우는 창덕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보물 제383호로 태종 12년(1412)에 처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9)에 다시 지어졌다.
이는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세운 문루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오늘은 창덕궁 문화해설사로 변신하였답니다!"
돈화문에서 잠시 기다리자 곧 반가운 손님이 등장하였다. 지난 5월, 경복궁을 소개해주신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장이 오늘은 창덕궁 문화해설사로 깜짝 변신하였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아량곳 하지 않고 몸소 창덕궁을 속속들이 누비며 나로 하여금 그간 모르고 지냈던 창덕궁의 매력 속으로 푹 빠지게 만들었다.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유일한 세계문화유산!"
태종 5년(1405)에 완공된 창덕궁은 당시 정궁이었던 경복궁과는 달리 최초 하나의 별궁으로 창건되었다. 그 후 꾸준하게 주요 시설들을 갖추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궁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은 기존의 반듯하게 지어진 경복궁과는 달리 최대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어진 점이 가장 큰 차이이자 당시 왕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였다. 또한 경복궁은 임금의 신하들이 설계하였다면 창덕궁은 왕의 의중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독 창덕궁에는 연못과 후원 등이 많이 조성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왕들이 머문 기간이 더 길었다고 한다.
"공명 정대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금천교!"
매일 아침 궁궐을 출입하는 신하들의 나쁜 마음과 이기심을 흐르는 시냇물에 깨끗히 씻고 들어가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상이 금천교 위에서 신하들을 떡하니 감시하는 모습이 실로 무시무시하다. 오늘날의 국회의사당에도 금천교같은 돌다리가 놓여져 있다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조심스레 들었다.
"임금을 알현하러 가는 길!"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으며 마당에는 중앙에는 오직 왕만이 다닐 수 있는 어도가 펼쳐진다. 태종은 진선문에다가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이 곳까지 들어와서 북을 두들기는 용감한 백성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조선의 역사는 이 곳에서 만들어졌다!"
국보 제 225호로 지정된 인정전은 임금이 국정을 보는 근무하는 공간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거행된 대표적인 공간이다. 이 곳에서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즉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사를 거행할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하게 된다. 지금의 인정전은 순조 30년(1830)에 화재로 소실되어 그 이듬해 중건되었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창덕궁!"
이처럼 아름다운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 후 선조 40년(1607)에 복구가 시작되어 3년 뒤인 광해군 2년(1610)에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인해 인정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 전소되었다. 이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로 인해 복원되기를 수 차례 반복되었다. 하지만 창덕궁은 수많은 화재 속에서도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어 실로 다행스럽다.
"내가 왕이라도 이 곳에서 살고 싶다!"
사실 창덕궁보다 경복궁을 먼저 복원하는 것이 맞는 수순이었지만 선조는 창덕궁을 선택하였다. 산과 언덕의 지형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친환경적으로 지어진 창덕궁은 그만큼 머무는 자로 하여금 안정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탁 트인 경복궁과는 달리 산자락을 따라 지그재그로 지어진 건물들은 임금의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보다 화려할 수는 없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을 비롯하여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 등이 거처하였던 낙선재는 아름다운 꽃계단과 꽃담 등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특히 낙선재 후원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육각형 모양의 누각인 상량전은 궁궐에 있는 정자로는 이례적으로 무척 화려하였다.
"지금부터 왕들이 창덕궁을 사랑한 진짜 이유가 밝혀진다!"
창덕궁의 진정한 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후원을 빼놓고는 감히 논할 수 없다. 다만 자유관람인 궁궐과는 달리 후원은 숲과 나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제한관람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지정된 문화해설사와 함께 지정된 시간에 입장하여야 하며 요금도 추가로 지불해야 된다.
"가히 우리나라 최대의 궁중 정원인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에는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존덕지 같은 연못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등 아담한 규모의 정자들이 세워 자연과의 조화를 잊지 않고 있다.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후원은 과거 호랑이나 표범같은 맹수들이 나타날 정도로 깊고 울창하였다고 한다.
"사랑 그리고 이별!"
후원에서는 왕이 직접 주관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기도 하였는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 군사 훈련, 활쏘기 대회 심지어 불꽃놀이까지 하였다고 한다. 또한 왕이 직접 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경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창덕궁 후원에는 조선의 운명을 책임져야만 했던 왕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창덕궁은 왕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결국 조선 왕조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라의 국권을 일제에 이양하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 회의가 창덕궁 흥복헌에서 열렸으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중전인 순정효황후가 창덕궁에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불로문만이 주인을 잃은 채 쓸쓸히 찬란했던 그 때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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