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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내가 만든 초콜릿이야!"
어린 시절 나는 전형적인 먹튀였다. 발렌타인데이는 학기가 끝나가는 무렵인 2월 14일이다. 그말인즉슨 1년 동안 친하게 지낸 같은 반 여자아이들에게 초코릿을 잔뜩 선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 나는 처음 같은 반이 된 예쁜 여자아이들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하느라 바빴다.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님하 죽을래요?"
"어느새 하루 앞으로 다가온 화이트데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세상에 하나 뿐인 여자친구에게 먹튀를 감행하는 행위는 이등병이 병장의 하나 남은 라면을 훔쳐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확실하게 준비하여 여자친구의 사랑을 듬뿍 받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솔로 지옥! 커플 천국!"
나른한 주말 오후, 방에서 뒹굴거리고 싶었지만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오피스텔 근처에 위치한 영등포 타임스퀘어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날씨가 많이 풀려서 그런지 거리에는 쇼핑하러 나온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더욱 엄밀히 말하자면 커플들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함부로 지나가서는 안되는 곳!"
백화점에 가면 항상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한 유명 명품샵, 특히 남자의 입장에서는 아무 이유없이 두려운 곳이다. 눈부시게 화려한 매장입구는 마치 끝판대장이 위치한 어두운 던전 입구같다고나 할까?
"자기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으음! 많지! 백? 구두? 화장품!"
신기하게도 여자들은 항상 갖고 싶은 것들이 많다. 마치 남자들이 습관처럼 말하는 진짜? 누구? 예뻐?처럼 여자들도 백, 구두, 화장품순으로 매우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좋아한다. 물론 당장 사는 것도 아닌데 갖고 싶은 아이템을 상상하며 정말 행복해한다. 마치 내가 카메라 매장에 가서 고가의 렌즈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가 아닐까?
"지갑이 없는 여자친구!"
지난 추운 겨울밤, 바쁜 나를 위해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며 버스를 타고 달려온 여자친구, 오는 내내 알콩달콩 전화통화를 하다가 그만 버스에 지갑을 두고 내렸다. 여자에게 지갑이 단순히 돈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다. 각종 카드는 말할 것도 없고 편지, 사진, 티켓 등 소중한 추억들이 가득 담겨져 있는 보물창고인 셈이다.
무척 속상해 하는 여자친구를 보면서 나 역시 가슴이 무척 아팠다. 참고로 여자친구는 정작 자신의 지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일에 근사한 명함지갑을 선물해주는 한없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선물의 완성은 포장!"
여자친구를 위한 선물을 손에 고이 들고 냉큼 예쁘게 포장해주는 곳으로 뛰어갔다. 마음같아서는 직접 내 손으로 포장하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 하다.
"예쁘게 포장해주세요!"
사실 나는 쇼핑하러 다니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 PC방, 당구장에서는 밤새 신나게 놀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많은 쇼피몰로 나오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머리가 아파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여자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니 포장지를 고르는 내내 신이 났다.
"이거 맛있겟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상자를 들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였다. 자고로 선물은 선물이고 사탕은 사탕이다. 이미 곳곳에는 화이트데이를 맞이하여 온갖 사탕들이 커플들의 유혹하고 있었다. 역시 직접 만들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이 또한 명백히 시기상조이다.
"이 곳이라면?"
한참을 둘러보다 나의 눈길을 끈 매장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위니비니였다. 이미 좁은 매장 안은 손님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번만큼은 뻔한 사탕이 아니라 좀 더 특이한 것을 선물하고 싶었기에 용기내어 들어가보기로 했다.
"처음 보는 녀석들이 많군!"
매장 안에는 난생 처음 보는 초콜릿과 캔디, 젤리, 머쉬 멜로우 등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본인이 직접 먹고 싶은 것을 원하는 만큼 담아서 구입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참고로 나는 쇼핑하는 것도 정말 싫어하지만 이런 방식도 절대 선호하지 않는다.
"지금 그런거 따질 때가 아니죠!"
"암요!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해야죠!"
딱 봐도 하나같이 나같은 남자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비닐봉투에 캔디를 담아 계산대로 가져갔다. 사진에서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겠지만 실제 분위기는 매우 전투적이었다.
"일년에 딱 한번 뿐인 화이트데이!"
특히 요즘 여자친구에게 만날 화내고 못된 말만 골라서 하였다. 속마음은 절대 그런게 아닌데 나도 모르게 나쁜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찌보면 이 또한 일회성 이벤트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건 준비하는 내내 진정으로 즐거웠다는 사실이다. 오늘만큼은 그녀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고 싶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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