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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미워! 저리가!"
"아흑!"
그 놈의 술이 웬수다. 지난밤 지인들과의 술자리는 어김없이 동틀 무렵까지 이어졌고, 가방 깊숙이 잠들어있던 휴대폰은 무용지물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여친님께서는 급기야 대화거부를 선언하였다. 부랴부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여친님을 만나기 위해 집을 뛰쳐나왔다.
막상 집을 나서니 시간이 제법 많이 남았다. 그렇다고 거리를 헤메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워 인근에 위치한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마침 백화점 겨울정기세일이 한창이었다. 전부터 눈여겨 보았던 운동화도 가격인하가 되었는지 궁금하여 매장을 방문해보았다.
"남자라면 페라리!"
빨간 스포츠카 아니 운동화는 세일이 한창이었다. 평소 같으면 인터넷 쇼핑을 이용하겠지만 세일 중일때는 백화점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구입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바람직한 시기가 아니다. 집을 나선 본래의 목적을 떠올리니 차마 기분 좋게 새 운동화를 구입할 형편이 아니었다. 아쉬운 발걸음 뒤로 하고 매장을 나서려는 찰나, 신상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저 것은 RS100 Speckle!"
"공효진 운동화로 더 유명하죠!"
신상품 코너에는 작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파스타에서 주연으로 열연한 공효진이 신고나온 푸마 RS100 Speckle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당시에만 하여도 국내에는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았기에 구하기자 매우 힘든 모델이었다. 지금도 여성용 사이즈에 경우에는 거의 품절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이 시간에도 혹시나 싶어 인터넷 쇼핑몰을 검색해보니 위 사진과 동일한 모델의 여성용 사이즈는 모두 매진이었다.
"저기 혹시 230있나요?"
"고객님은 행운아입니다! 마침 딱 한 켤레 남아있답니다!"
"당장 주세요!"
이건 마치 신데렐라에게 유리구두가 있듯이 여친님을 위한 운동화였다. 항상 그녀가 말하기를 파스타가 그간 죽어있던 연애세포를 되살려 주었다고 하였기에 분명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였다. 만약 당시에 그녀가 파스타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관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적으로 운동화 하나에 너무 오버했다!"
"그...그렇죠?"
"선물의 완성은 포장!"
과도한 포장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한한 기대와 감동을 불러온다. 새 운동화를 들고 냉큼 1층에 위치한 선물포장코너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집을 나설 때 미리 작성한 반성문을 선물 상자에 같이 넣었다.
"무조건 예쁘게 포장해주세요!"
"18000원입니다!"
"헐! 리본 하나 빼주세요!"
가격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여친님의 마음만 풀린다면 금으로 만든 상자에 담는다고 한들 아까울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였지만 결국 리본 하나를 빼는데 합의하였다. 그래도 정말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보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언제 보아도 빛나는 그녀, 하지만 표정은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이때부터 한 남자의 처절한 빌기모드가 시작되었다. 하염없이 빌고 빌고 또 빌었다. 한동안은 그녀도 꿋꿋하게 표정관리를 하였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바로 이 순간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준비한 선물상자를 건네주었다.
"너를 향한 나의 마음!"
"누가 반성문을 엽서에 쓰래?"
"앜ㅋㅋㅋㅋㅋㅋ"
"우와! 이 아이는 RS100 Speckle!"
"빙고!"
"완전 예쁘다!"
"진짜?"
"응응!"
다행히 여친님께서는 매우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평소 탤런트 이선균을 사모하는 그녀, 이 순간만큼은 마치 내가 이선균이 된 기분이었다. 참고로 RS100 Speckle에서 스패클은 작은 반점이라는 뜻이다.
"근데 오빠! 정말 용감한 거 아니야?"
"왜?"
"새 운동화 신고 도망가면 어쩔려고!"
"걱정마! 이미 위성추적장치 탑재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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