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지난 글보기
오늘은 상병 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때는 혹한기 훈련을 3주 앞둔 어느날, 소대장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78연대가 혹한기훈련을 뛰는데, 우리 대대가 대항군로 선정되었다고 하였다. 대항군의 역할은 이미 몇차례 언급하였기에 넘어가겠다. 갑작스런 훈련소식에 우리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2009/05/11 - [가츠의 군대이야기] - 가츠의 군대이야기, 7사단대항군
"이거 뭐 올해는 혹한기훈련 2번 뛰는 거랑 다를바 없지 말입니다!"
"왜 하필 우리 대대야? 우리 말고도 많잖아! 아 왜!"
특히, 전역을 한달 앞둔 말년병장들의 불만과 좌절을 상상을 초월하였다. 전역을 앞두고 혹한기훈련을 뛰는 것도 서러운데, 대항군까지 뛰어야 되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행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영하 20도가 훌쩍 넘는 산 속에서 보내야하는 것은 똑같지만 말이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훈련 첫날이다. 하지만 78연대가 출발행군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종일 주둔지에서 대기하였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대기하고 있으니, 은근히 괜찮았다.
"은근히 빵실(널널)한데 말입니다!"
"그런 말 하지마라! 꼭 그런 말하고 나면 작업이 생겨!"
아니나 다를까?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하였다. 삽시간에 온천지가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이내 행정반에서 들려오는 전파.
"전 병력 제설작업 집합하시랍니다!"
"●█▀█▄"
종일 제설작업을 하며 보냈다. 문득 폭설을 맞으며 행군하고 있을 78연대를 생각하니 측은하였다. 그들에게 오늘밤은 꽤나 험난할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이제 우리들도 대항군 역할을 하기 위해 출동하여야 한다. 하지만 어김없이 눈이 펑펑 내렸고,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잠시후, 소대장이 내무실로 들어오더니 말하였다.
"변경사항이 있구나! 공격출동은 소대장, 전령, 수기병으로 구성하여 소대마다 3명만 나간다!"
"올레! 브라보!"
"자자 조용하고, 수기병하고 싶은 사람?"
"수기병은 뭐하는 겁니까?"
"말그대로 깃발을 들고 있는거지!"
그랬다! 우리는 말그대로 대항군이다. 78연대는 전 병력이 출동하여 훈련을 뛰지만, 우리는 대대 병력이기 때문에 기존의 단위보다 한단계씩 업그레이드 된다고 보면 된다. 소대는 중대로, 중대는 대대로 묘사된다. 고로, 소대장은 중대장이 되는 것이다. 황색수기가 1개 중대라는 것을 묘사해준다.
문제는 누가 수기병이 되는냐에 달렸다. 어차피 소대장과 전령은 출동해야 되고, 한 명의 수기병은 지금 지원받고 있다. 하지만 이등병을 내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병장이 나갈리도 없다. 결국은 일병이나 상병에서 나가야되는데, 선뜻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상병 막내였던 나는 일병들을 훝어보았다. 하나같이 나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인 채, 손만 꼼지락거렸다.
"이것들이 개념을 상실했구만! 후딱후딱 손 안드나!"
나는 좀 더 눈에 힘을 주고 째려보았는데,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병장들은 하나같이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뭡...뭡니까? 이건 아니지 말입니다!"
"맞지 말입니다! 우리 가츠 상병이 적임자지 말입니다!"
점점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었다. 평소 나를 좋아하는 소대장도, 전령인 노일병도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사람의 눈이 하트 모양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수기병이 되었다.
고참들이 나를 선택한 이유는, 괜히 어리버리한 일병 보냈다가 사고라도 치면, 안 그래도 소대원 놔두고 홀로 훈련나간 소대장의 심기가 불편해질 것이기 자명하기에, 평소 소대장과 친하고 재밌는 나를 적임자로 선택한 것이다. 마치 기쁨조가 된 기분이었다.
"왠지 팔려가는 거 같다! 어흐흑흑ㅜㅜ"
"얼어죽고 싶지 않으면 다 챙겨!"
그렇게 우리들은 소대 대표로 출동하였다. 출발하기 전, 철저하게 방한대책을 강구하였다. 평소에는 수량이 모자라서 신지도 못하는 방한화, 방한수갑, 방한모 등을 비롯하여 챙길 수 있는 모든 방한용품을 바리바리 챙겼다. 잠시후 우리를 태우고 갈 군용트럭이 연병장에 들어왔다. 각 소대마다 3명, 총 50여명의 선택받은 전사들은 트럭을 타고 주둔지를 떠났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공격시간은 내일 새벽 3시이므로 일단 신포리에 있는 전차중대로 가서 대기한다!"
"오오! 전차중대 말입니까?"
춘천가는 길목에 위치한 전차중대는 휴가 출발이나 복귀할 때 지나가며 보기만 한 곳이었다. 그렇게 40여분을 달려 도착하였다. 우리가 새벽까지 묵을 곳은 전차중대 체육관이었다. 비록 내무실이 아닌 체육관이지만 따뜻하게 보낼 수만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였다.
"이거 은근히 훈련나오길 잘했는데! 내일 새벽까지 그냥 푹 쉬는 거 아냐!"
"그러게 말입니다! 어차피 공격도 뭐! 몇시간만 걸으면 끝날텐데 말입니다!"
"후훗! 주둔지에서 제설작업하고 근무나가는 거 보다 훨씬 낫다!"
"브라보!"
노일병과 나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였다. 소대장은 새벽에 기동해야되니 미리 눈을 붙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저녁식사 시간이라며 취사장으로 오라고 하였다. 소대장은 회의를 하러 가고 없었기에, 노일병과 함께 식당으로 갔다.
저녁 메뉴는 돈가스였다. 전차중대는 독립부대이다 보니, 주둔하고 있는 병력이 많지 않았다. 그말인즉슨, 요리를 대량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리의 퀄리티가 훨씬 높아진단는 것이다. 게다가 나눠야 할 대상이 적기 때문에 양도 넉넉하였다.
평소 2개씩만 먹을 수 있는 돈가스가 이 곳에서는 자율배식이었다. 우리는 즐거워하며 왕창 받아가지고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판을 닦기 위해 세면대로 갔다. 수도꼭지를 돌려 물로 헹구는데, 느낌이 이상하였다.
"믿...믿을 수 없어! 온수가 나와!"
머리카락이 쭈삣 서는 느낌이었다. 수도꼭지에서는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다. 옆에서 설거지하던 노일병도 깜짝 놀라하며 나를 바라 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취사병이나 전차중대 아저씨들은 당연하단듯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에서 온수라고는 훈련 복귀할 때나 겨우 구경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마저도 모자라서 늦게 씻으러가면 찬 물로 해야만 하였다. 그런 귀한 온수를 설거지하는데 펑펑 쓰고 있다니, 실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날,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군대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구나!
반응형
'가츠의 군대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츠의 군대이야기, 도장 (213) | 2010.01.19 |
---|---|
가츠의 군대이야기, 사단장 (288) | 2010.01.14 |
가츠의 군대이야기, 혹한기훈련 완결편 (263) | 2010.01.06 |
가츠의 군대이야기, 혹한기훈련 8편 (182) | 2010.01.05 |
가츠의 군대이야기, 혹한기훈련 7편 (225) | 2009.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