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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병 때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때는 바야흐로 05년 11월, 우리 중대는 전투사격 훈련을 뛰고 있었다. 전군에서 훈련양이 가장 많기로 유명한 이기자부대이기에 겨울을 코 앞에 앞두고, 후반기에 계획된 훈련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투사격은 전반기, 후반기 각각 한 차례씩 실시하는데,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이루어진다. 게다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야간에 중대로 복귀해서 잠을 자기 때문에 크게 힘들지는 않다.
물론, 소총수 입장에서 말이다. 훈련의 질로 따지면, 준비태세, 행군, 각종 상황조치 등 모든 전술적인 요소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큰 훈련이랑 별반 차이가 없다. 흔히 상급부대나, 전문적인 주특기가 있는 병사들은 1년에 행군을 하는 횟수가 극히 적다. 기껏해야 유격훈련때나 한번 한다.
하지만 보병들은 삶이 행군이다. 부대에서 다이렉트로 걸어가면 2시간이면 도착하는 사격장도 하나같이 길도 아닌 깊은 산 속을 빙빙돌아서 5, 6시간을 걸어가곤 하였다. 그리고 종일 신나게 사격을 하고, 다시 5, 6시간을 돌아서 복귀한다. 그렇게 3일을 하면, 오히려 큰 훈련을 뛰는 거 보다도 더 많이 걷곤 한다. 대개 이런 자잘한 훈련이 1년에 십여차례가 넘게 잡혀있다. 물론 큰 훈련까지 합한다면, 1년에 소화하는 훈련은 20여회가 훌쩍 넘어간다. 괜히 전군 최고의 훈련양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06시, 기상과 동시에 준비태세가 발령되었고, 우리는 총알과 같은 스피드로 일어나서 침구류를 정리하고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때는 이등병이고 말년병장이고 차이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동안 시체와 같았던 말년병장들의 신들린 몸놀림을 확인할 수 있다. 겨우 단독군장을 착용하고 군장에 전투화를 구겨넣고 있을 때, 말년병장들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후임들을 닥달하고 있었다. 혹시 준비태세가 무엇인지 궁금하면 예전에 작성한 글을 참고하자.
2009/05/01 - [가츠의 군대이야기] - 가츠의 군대이야기, 준비태세
"아나 이것들! 장난하냐? 완전 개념을 상실했구만! 니들은 벌써 다 죽었어! 쯧쯧!"
이시간이야말로 후임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시간이다. 시간을 계속 흘러가고, 고참들은 닥달하고, 어느새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다. 지금은 일단 빨리 군장을 꾸리고 나가야 되기에 넘어가지만, 잠시 후 소산진지에서는 즐거운(?) 개념탑재교육이 예약되어 있다.
그렇게 준비태세를 마치고 나면, 아침을 먹고 본격적인 행군이 시작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첫날은 사격장에서 사격을 해야되므로 행군코스가 다소 짧다. 대개 첫날은 사격장에서 중대에서 가용되는 모든 화기를 직접 테스트한다. 둘째날과 셋째날은 중대별로 공격과 방어를 하는데, 그냥 하루종일 걷고 달리는 것이다.
기록사격이 아닌 말그래도 전투사격이기때문에 실제 전투에서 사격하듯이 분대별로 병사들이 연발로 사격을 실시한다. 게다가 평소에는 좀처럼 테스트할 수 없는 K-201 유탄발사기나 대전차화기, 박격포를 직접 쏘아본다. 물론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에 어느때보다 간부들이나 고참들의 신경이 날카롭다. 알아서 기어야 된다. 괜히 어리버리 했다가는 1초만에 땅에 묻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오늘 탄피 잃어버리는 놈은 진짜 각오해라!"
분대장은 우리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한발씩 쏘는 기록사격에서도 꼭 탄피를 잃어버리곤 하는데, 분대별로 연발로 갈겨된다면 안봐도 비디오였다. 다만 그 주인공이 자신이 되지 않기만을 빌어야 했다.
어느새 일병 5개월차인 나는 행군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신기하게 구보만은 병장이 되어서도 무척 힘들었지만, 걷는 거 하나만큼은 자신있었다. 묵묵히 산을 타고, 강을 건너며 걷기를 수 시간째다. 빨리 도착해서 사격을 해야되기에 선두에 있는 중대장은 더욱 행군속도를 끌어올렸다. 사격장은 무척 높은 고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고개를 올라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미 지쳐버린 우리들에게는 고비였다. 그날따라 나도 무척이나 힘들게 느껴졌다. 이럴 때 드는 생각은 한가지 뿐이다.
"슬슬 누가 낙오할 때가 되었는데!"
그랬다! 누군가 낙오를 하게 되면, 바로 간부와 고참들의 극진한 힐과 버프세례를 받는다.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아도 나 또한 자연스레 치유가 되는거 같았다. 고로 전우의 낙오는 나에게 동기부여가 되었다.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귀여운 신병들이 쳐지기 시작하였다. 하긴 이정도면 꽤나 잘 버틴 셈이다.
부소대장과 분대장이 급히 투입되어 쳐진 신병들에게 연신 힐을 시전하고 있다. 다행히 주문이 제대로 먹혔는지, 이내 대열에 합류하였고, 전원 무사히 사격장에 도착하였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사격훈련이 시작된다. 포반은 박격포 사격을 위해 따로 이동하였고, 우리들도 K-2, K-201, K-3 자신의 화기에 맞게 분산되어 사격준비를 하였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기에, 우리들은 점심을 배식하며 식사를 하였다. 분대별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멀리서 중대장이 뛰어오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대전차화기조 나와라!"
대전차화기? 소총중대에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탱크를 잡기위한 대전차화기조를 운용하고 있다. 가츠의 군대이야기 첫 편에서 자세히 언급하였는데, Panzerfaust 3와 M72LAW다. 쉽게 말해서 바주카포 같은거다. 이 역시 상세히 알고 싶으면 다음 글을 참고하자.
2009/04/13 - [가츠의 군대이야기] - 가츠의 군대이야기, 첫 포상휴가
당시 지난 훈련에서 M72LAW로 적 전차를 잡고 당당히 포상휴가를 나간 나는 자신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갔다. 소대가 2명씩 총 6명의 병사가 나왔다. 사연인즉슨, 오늘 M72LAW를 쏘는데 대대장이 직접 와서 참관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M72LAW는 평소에는 구경도 하지 못하는 한발에 100만원이나 하는 고가의 무기이다. 고로 딱 한번의 기회가 있는데, 무조건 맞춰야 한다!
"이런건 절대 하면 안돼!"
나의 위기관리 세포는 절대 하지말라고 경고를 하였다. 나는 잽싸게 5명의 병사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일병 5개월인 내가 가장 고참이었다. 자연스레 후임들에게 무언의 눈빛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느낀바가 있는지, 하나같이 나의 시선을 피하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의 전공을 기억하고 있는 중대장이 나를 지목할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강력한 눈빛을 날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미실도 말하지 않았는가?
"살짝 입꼬리만 올려! 그래야 더 강해보인다!"
그제서야 나의 시선을 피하던 녀석들이 너도나도 자기가 하고 싶다며 손을 들기 시작하였다. 중대장은 그 중에서 제일 똘똘한 2소대 김일병을 지목하였다. 지목당한 김일병을 뒤로 하고 우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그는 그만의 우리에 갇혀버린 것이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우리 속으로 말이다.
잠시후, 탄약반장이 탄 군용트럭이 도착하였고, 짐칸에서 조심스레 M72LAW가 들어있는 박스를 내렸다. 나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오리지널이었다. 탱크의 두꺼운 장갑차도 단숨에 뚫어버리는 가공할 무기이다. 김일병은 연신 교육을 받으며 실전에 대비하였다.
목표는 약 100m 전방에 있는 노후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전차였다. 김일병은 대대장이 올 때까지 열심히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며 만반의 대비를 하였다. 하긴 명중만 한다면야, 대대장이 신나서 포상휴가증을 줄 수도 있으니 그렇지 나쁘지 않다. 그리고 언제 대전차화기를 한번 쏘아보겠는가? 전역하고 평생을 울궈먹을 수 있는 추억을 만들 수 있다.
"그래도 난 쏘고 싶지 않아! 앜ㅋㅋㅋㅋ"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굳이 위험을 사서 하고 싶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사격장 아래에서 대대장의 지휘관 차량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대낮의 강렬한 태양빛을 받으며 지휘관차량의 앞 유리창은 연신 반짝거렸다. 중대장은 잽싸게 뛰어가서 차량을 문을 열고는 힘차게 경례를 하였다.
지휘봉을 들고, 환한 웃음으로 내린 대대장은 답례를 하였다. 다행히 오늘은 대대장의 컨디션이 좋은가보다. 곧, 자리를 잡은 대대장은 중대장의 브리핑을 들으며 전방에 있는 전차를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그 시간, 탄약반장은 M72LAW를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점검하고 있었다. 드디어 상자에서 실체를 드러낸 M72LAW는 말그대로 폭풍간지였다. 발사시 뒷쪽으로 후폭풍 발생하기 때문에 조심하여야 한다. 단지 후폭풍만으로도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사격장에 있는 모든 인원의 시선이 탄약반장과 김일병에게로 향하였다. 특히, 대대장 바로 옆에 서 있는 중대장의 눈빛은 무척이나 간절해보였다. 잠시후 힘찬 구호와 김일병은 탄약반장으로부터 M72LAW를 건네받았다. 방금 교육받은대로 엣지있게 자세를 잡은 김일병은 사격지시에 따라 전방의 전차에 향해 힘차게 격발하였다.
"파아아앙!"
위 사진은 다른 무기인데, 대충 저런 분위기였다. 엄청난 폭파음과 화염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발사된 미사일은 전차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전차 주변에는 어떠한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전차가 위치한 훨씬 뒷 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명중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김일병은 대대장이 보는 앞에서 100만원짜리 미사일을 낼름 날려먹은 것이다.
중대장은 그저 멍하니 전차를 바라보고 있었고, 대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서는 차량을 향해 걸어갔다. 구경하던 우리들도 그저 땅만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탄약반장은 발사된 M72LAW를 묵묵히 상자에 담고 있었다. 김일병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마음 속으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우리에 갇혔는데, 불이 난 것이다.
이대로 장렬하게 산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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