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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04년 6월 30일, 중국에서의 파란만장한 캠퍼스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군대를 가기 위해 귀국해야 한다. 방안에서 나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2년 넘게 생활한지라, 챙기고 가야 할 짐이 너무 많았다. 평소에는 방학때마다 잠깐 귀국하는거라 약간의 옷만 챙기면 되었는데, 이번에는 모든 짐을 다 챙기고 가야만 했다.
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짐이 2년동안 모은 DVD였다. 요즘에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DVD가 무척이나 저렴하였다. 물론, 한국에서는 불법으로 취급되는 짝퉁 DVD였지만, 중국에서는 그게 정품이었다. 번화가의 대형 음반, DVD매장을 방문하면, 버젓이 진열대 올려놓고 파는 물품이다.
"여긴 천국이야!"
가격은 한국돈으로 장당 500, 1000원 수준이었다. 음반, DVD, 게임CD 등 전세계 모든 제품이 유통되고 있다. 심지어는 한국에서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도 DVD로 팔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죄다 불법인 것은 아니다. 가끔 잘 살펴보면 정식으로 수입된 정품도 있었다. 특히, 일본 음반이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것 또한 죄다 저렴한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기에 발견하는 날에는 운수대통이다.
나는 매주 여러 매장을 돌아다니며, 보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만원이면 20장의 음반, DVD, 게임CD를 구입할 수 있었기에 정말 행복하였다. 고로 나는 2년동안 무수하게 많은 DVD를 사모았고, 방에 한쪽 벽면을 한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대략 천여장쯤 되는 거 같았다.
문제는 이제 귀국을 해야하기에 모두 가지고 가야만 한다. 부피도 부피지만, 한국에서는 불법 DVD로 관리되기 때문에 행여, 입국시 세관에 걸리면 어떻게 될 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짐을 꾸리다가 문득, 불안하여 옆에 있던 선배에게 물어 보았다.
"이거 가지고 들어가다가 세관에 걸리면 압수당할려나?"
"글쎄? 니가 상업적으로 유통할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
얼마전, 선배 한 명이 짝퉁 롤렉스 시계를 왕창 사가지고 귀국하다가 세관에 적발되어 압수당하였다. 하지만 DVD의 경우에는 개인 소장을 목적으로 가지고 입국하기에 별 문제가 없을 거 같았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중국에서는 합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제품이었고, 정품을 사고 싶어도 구할 수 없었다.
한국과는 반대로 오히려 정식 라이센스로 수입된 정품을 사기 위해서는 주문을 해야지만 어렵사리 겨우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은 저작권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매장에서 공안(경찰)들과 같이 대화를 나누며 물건을 구입하는 판국이었으니, 더이상 할 말이 없다.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DVD를 들고는 한국영화 최고! 라고 하던 외치던 공안 아저씨의 미소가 떠오른다.
"이걸 어떻게 다 가지고 가지?"
막상 박스에 담을려고 하니, 어림도 없었다. 도저히 비행기를 타고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DVD 케이스를 모두 제거하였다. 애지중지하던 DVD를 하나하나 300장들이 DVD가방에 담기 시작하였다. 가방 4개를 채우고서야 모두 담을 수 있었다. 이제 내일 무사히 귀국하기만 된다.
다음날, 드디어 한국으로 가는 날이다. 정든 교정과 사람들을 뒤로 하고 하얼빈 공항으로 서둘러 떠났다. 인천과 하얼빈 직항노선은 아시아나항공과 중국 북방항공이 운행되고 있었다. 인천에서 탑승자을 태우고 항공기가 하얼빈으로 온다. 나는 인천에서 온 항공기를 타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간다. 대략 2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
티켓팅을 하고 항공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평소보다 늦게 출발하였나보다.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가까이 지연되고서야 탑승할 수 있었다. 집이 지방이기 때문에 도착하면 다시 인천공항에서 울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된다. 미리 예약은 해놓았지만, 너무 늦으면 탈 수 없다. 정시운행을 하도 빠듯한데, 1시간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정말 아슬아슬할 거 같았다.
지난 밤, 과도한 음주때문일까? 탑승하자마자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얼마후 기내방송이 나오더니 입국수속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서 입국카드를 작성하였다. 곧, 무사히 착륙하였고 입국 심사대로 총알같이 뛰어갔다. 울산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정말 빠듯하였다.
"본인 맞음? 조선족 아님?"
"아나 저 맞거든요!"
바빠 죽겠는데, 그날따라 심사관은 이것저것 자세하게 확인하였다. 가까스로 입국을 한 나는 짐을 찾기 위해 이동하였다. 사실 빨리 입국수속을 마쳐봤자, 짐이 안나오면 말짱 도로묵이었다. 커다란 3단 캐리어가방만 2개에 박스만 4개였다. 컨테이너 벨트 앞에서 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양 옆으로 마약탐지견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는데?"
출입구 세관 검사하는 곳을 바라보니, 그날따라 전 직원이 정위치 근무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늦은 시간이라 아예 검사를 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한 두명이 의례적으로 서 있는데 말이다. 문득 벽면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보였다. 세관신고 집중단속 기간이라고 떡하니 적혀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왜 하필 완전귀국하는 날에 집중단속을 하고 난리야! 문득 박스안에 있는 DVD가 걱정되었다. 아무리 유학생이 그동안 모은 것들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해도, 꼬투리를 잡으면 분명히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였다.
나는 소심하게 짐을 하나 하나 캐리어에 실었다. 벽면에 설치 된 감시카메라가 나를 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모은 DVD인데, 설마 다 뺏기는 건 아니겠지? 나는 점점 긴장되었고, 불안해졌다.
"아니야! 난 떳떳해! 보란듯이 통과해주마!"
짐을 다 실고는 조심스레 캐리어를 밀면서 출구 쪽으로 갔다. 절대 눈을 마주치면 안돼! 표정은 자신있게!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 모드로 출구를 향해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었다.
30m 20m 10m 점점 출구와 가까워 지고 있다. 이제 몇 발자국만 더 나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출구 밖, 자유의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하고 있다. 그 순간!
"님하! 일로오삼!"
아흑... 고지가 바로 코 앞인데, 무심한 세관원은 나를 불러 세우고는 검사대 쪽으로 안내하였다. 하긴 딱봐도 엄청난 짐과 중국에서 들어온 항공기, 세관원들에게는 최고의 먹잇감이 아니겠는가? 나는 주삣거리며 검사대 앞으로 가서 줄을 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검사를 받고 있었는데, 죄다 하나같이 세관신고를 안했거나, 국내반입이 안되는 물품들이 적발되었다.
분위기가 너무 안 좋다. 나는 온갖 잔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도무지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자포자기하는 순간, 출구 쪽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애타게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가츠님! 가츠님 나와라 오바~♥"
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니, 한 눈에 봐도 빼어난 외모를 지닌 스튜어디스였다. 한 손에는 무전기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나를 찾고 있었다.
"누나! 여기요! 저 좀 구해주세요 어흐흑흑ㅜㅜ"
"어머 가츠님! 여기 계셨네요!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비행기 곧 이륙해요!"
미모의 스튜어디스는 세관원을 바라보며 다급한 눈빛을 날렸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관원은 우리의 대화를 들은건지, 그녀의 미모에 홀린건지는 모르겠지만 미소를 지으며 가도 좋다는 손짓을 하였다. 올레!
나는 우아하게 캐리어를 밀며 세관검색대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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