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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99년 6월,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수학여행을 하루 앞두고, 나와 친구들은 모두 들떠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최고의 수학여행을 위한 작전회의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다들 처음 가는 제주도라서,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
푸른 하늘에 야자수가 드넓게 펼쳐지고, 에머랄드빛 바다가 보이는 해변에는 아리따운 누나들이 득실거리겠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연신 친구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헌팅의 진수를 설명하고 있었다.
"일단 마음에 들면 무조건 다가가서 말을 걸어야 돼!"
"머라고?"
"오일 발라 드릴까요?"
"아나~ 느끼한 놈!"
그렇게 말도 안되는 계획이었지만, 다들 상상만으로도 즐거워 하였다. 명색이 학창시절의 마지막 수학여행인데, 허무하게 보낼 순 없다. 다들 일탈을 꿈꾸고 있었다. 일탈이라 하면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지금이야 손만 뻗으면 술을 마실 수 있지만, 17살의 학생들에게는 대단한 모험이다.
"술은 어떻게 구하지?"
"그러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니 얼굴이면 충분히 살 수 있어!"
"뭥미! 일단 가면 다 팔지 않을까?"
미성년자인 우리들은 합법적으로 술을 구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면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분명히 구할 것이다. 문득, 나의 머릿속에서 우리집 서재가 떠올랐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모아 두신 양주가 즐비하였다. 평소 간이 안 좋으신 아버지는 술을 드시지 않으셨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그저 바라만 보고 계셨다.
"너희들 양주 먹어봤냐?"
"아니!"
"아나 촌놈들! 내가 양주를 준비해올테니, 나머지는 물품은 너희들이 다 챙겨!"
하긴, 나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이참에 친구들에게 생색도 내고, 귀찮은 물품들도 안 챙겨도 되고, 이것이야말로 꿩먹고, 알먹고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잽싸게 서재로 들어가서 보관되어 있는 양주를 구경하였다.
양주에 대한 기본 지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뭐가 좋은건지도 몰랐다. 하나 하나 살펴보는데,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낯선 영어가 가득 적힌 양주 라벨을 보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발렌타인? 이건 고백할 때 마시는건가?"
라벨에 적힌 숫자는 뭔지 알겠는데, 양주 이름은 죄다 생소하였다. 어떤 거는 아예, 어떻게 발음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내 눈에 쏙 들어오는 양주를 발견하였다.
"시...시바스 리갈? 이거 입에 착 달라 붙는데?"
시바스 리갈~! 이런 멋진 이름을 가진 양주가 있다니~! 분명히 친구들도 좋아할 거 같았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샤워타올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양주를 돌돌 말았다. 그리고는 여행가방에 안전하게 넣어 두었다. 기다려라 제주도~! 내가 간다~!
지난 밤, 한 숨도 못 잤다. 소풍 전날은 왜 항상 잠이 안 오는 걸까?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학교로 갔다. 이미 운동장에는 우리를 태우고 갈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친구들은 다들 한껏 폼을 내며 모여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와서 여행가방을 두들겼다.
"제주도에서 분위기있게 한 잔 하자꾸나!"
"올레~ 빠라삐리뽕!"
친구들은 벌써부터 흥분하기 시작하였고, 우리는 제주도로 날아갔다. 공항 앞에서는 이국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야자수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가이드의 설명의 받으며, 우리들은 하루 종일 제주도 곳곳을 누비며 관광하였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비상구를 확인하며 탈주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1층 현관문을 제외하고는 나가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선생님이 떡하니 지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방에 있는 커텐을 뜯어서 긴 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2층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과 소통을 재개하였다.
곧이어, 근처 슈퍼를 투입한 친구들은 과자와 맥주, 소주를 사가지고 돌아왔고, 우리들만의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나는 하일라이트인 양주를 여행가방에서 조심스레 꺼내었다. 샤워타월을 풀자, 광채를 내며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바스다 시바스~ 들어나 봤냐? 시바스 리갈!"
"오오~ 왠지 좋아보여!"
끄응... 병따기도 힘들었다. 우리는 끙끙대며 양주병을 오픈하였고, 그윽한 향기가 방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냄새만으로도 취하는 거 같았다. 얼마나 마셨을까? 우리는 금새 취해 버렸다. 하나 둘씩 픽픽 쓰러졌고, 남은 녀석들은 취기가 올라, 전투적으로 변하였다.
이곳 저곳에서 베개가 날라오더니, 우리는 어느새 한데 어울려서 신나게 베개싸움을 하였다. 그렇게 학창시절의 마지막 수학여행은 멋진 추억을 가득 남기고 끝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부모님과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연신 생각을 하시더니 어머니에게 물었다.
"당신, 서재에 있던 양주 못 봤어?"
"양주? 모르겠는데? 없어?"
"이상하게 한 병이 없어! 당신 정말 몰라?"
"내가 당신 양주를 어떻게 알아!"
"당신이 청소하다가 깬 거 아냐?"
"아니 이사람이! 생전 청소도 안하면서 지금 그게 말이라고?"
평화롭던 식사시간이 살벌해진다. 나는 남은 밥을 잽싸게 입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빛의 속도로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부모님께서는 주방에서 티격태격하시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다행히 양주는 넘어 갔고, 다른 주제로 신나게 싸우고 계셨다.
현관문을 나서는 나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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