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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병장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때는 바야흐로 06년 12월초였다. 말년병장인 가츠군은 전역을 50일가량 남긴 시점이다. 부대는 한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계획된 훈련과 작업을 하기위해 여념이 없었다. 12월부터 1월까지는 너무나도 춥기 때문에 야외훈련을 되도록 피한다. 그렇다고 따뜻한 내무실에서 얌전히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온도계가 영하 20도를 가리키는 아침에도 알통구보를 하였다. 그 순간이 더 추운거 같다. 야외훈련은 옷이라도 따뜻하게 입고 다니는데 말이다. 그래도 혹한의 강원도 산 속에서 잔다는 건 결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다.
요즘 1박 2일이 대세이다.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자면서, 야생이다~! 하면서 즐거워 한다. 나도 재밌게 시청하고 있지만, 현역시절, 추위에 떨던 내 모습이 떠올라 몸서리치기도 한다. 야외훈련에서 아쉬운 점을 말해보라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오늘 이야기할 내용은 바로 드라마이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드라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뽑으라하면, 나는 주저없이 군인을 뽑겠다. 감히 아줌마들을 두고 무슨 소리냐?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당당히 군인이라고 말한다. 아줌마들이 아무리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해도 목숨걸고 보지는 않잖아? 군인들은 진짜 목숨걸고 본다!
공중파 인기 드라마의 방송시간은 언제나 밤 10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군인 취침시간도 밤 10시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그렇다고 밤 10시 땡하면 자는 것이 아니다. 군인들의 마음을 잘아는 중대 당직사관들은 11시까지 TV연등을 허락해주는 편이다. 물론, 대대나 연대에서는 모르게 말이다.
당시 최고의 인기드라마는 뭐니뭐니해도 한예슬 주연의 환상의 커플이다. 누구도 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주말 밤 9시 40분부터하는 드라마 시간에 맞춰서 점호를 취할 정도였다. 당직사관들도 빨리 점호를 마치고 드라마를 봐야하기 때문이다.
'이상 점호를 마치겠다~! 금일 TV연등은 23시까지 전략적으로 취할 수 있도록~!'
'당직사관님 만세! 만세! 만세!'
전략적이란? TV를 몰래 보다가 내무실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잽싸게 끄고 자는척하라는 거다. 그렇게 우리들은 침낭속에서 고개만 빼곰히 내밀고는 TV를 보았다. 리모콘은 내손에 들려있다. 나의 손가락질 한번에 우리 소대의 목숨이 달려있다. 행여 너무 TV에 몰입하다가 끄는 타이밍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날 잠은 다 잔 것이다.
터벅터벅~!
띠리링~♪ 후다닥~! 자는척 zzZ 내무실밖에서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려 전광석화같이 TV를 끄고 침낭 속으로 파고들었다. 20살넘은 한무리의 남자들이 동시에 그런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웃기겠는가? 제식따윈 이미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전역을 2주남긴 말년병장, 심병장마저도 그순간만큼은 이등병보다 잽싸다~!
'2소대 근무자입니다~!'
'아나~! 키스장면이었는데~!'
잽싸게 침낭속에서 머리를 내미는 한 무리의 군인들, 마치 침투작전을 펼치는 무장공비와도 같다. 쥐죽은듯이 초롱초롱한 눈빛만 보인다. 드라마는 점점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그순간, 내무실 밖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띠리링~♪ 후다닥~! 자는척 zzZ 아~! 지금 하일라이트인데.. 침낭속에서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진짜 드라마 한번 보면서 몇번을 켰다껐다 하는건지 모르겠다.
'근무자들 라면 먹는다고 물받고 있습니다~!'
'아나~! 라면 원샷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라고해~!'
좋아~! 다시 보는거야~! 우리는 꿋꿋하게 시청을 한다. 기필코 끝까지 볼테다~! 얼마나 봤을까? 또 들리는 발자국 소리... 다시 자는척. 2소대 불침번이 들어오더니 연대 당직사령이 대대로 순찰왔으니 무조건 다 자란다. 어흐흑흑ㅜㅜ
그렇게 우리는 목숨걸고 드라마를 보았다.
오늘은 환상의커플 마지막회가 하는 날이다. 사실, 마지막회는 평소보다 별로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안보면 허전하다. 마지막회는 무조건 봐줘야지 그동안 좋아했던 시청자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오늘 대대 당직사령은 전 중대장이셨던 군수장교님이셨고, 당직사관은 2소대장님이다. 안타깝게도 그날은 부대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았다. 당연히 대대에서는 TV연등 지시가 없었다.
'이상~! 점호끝~! 오늘 당직사령 누군지 알지? TV연등없다~! 10시되면 바로 끄고 일찍 잘 수 있도록~!'
'헉~! 소대장님~! 오늘 환플 마지막회인데 말입니다~! 전략적으로 하면 안됩니까?'
'안돼~! 오늘은 22시되면 무조건 취침소등~!'
이 무슨 엿같은 경우인가? 마지막회를 못보다니~! 이럴순 없어~! 재깍재깍 시계는 밤 10시를 향해 쉬지 않고 흘러간다. 이제 TV를 꺼야한다. 이미 드라마는 20분이나 진행되어 점점 최고조로 치닫고 있는데 말이다. 10시가 되자 당직병이 들어왔고, TV를 끄라고 종용하였다.
'꼬라지하고는~!'
침낭속에서 눈을 감았다. 상상이라도 하자~! 아까 한예슬이 어디까지 말했지~! 음.. 그럼 오지호가 뭐라고 할까? 아아아아 궁금해~! 미치겠다~!
'야 불침번~! 잘 들어~! 이제부터 넌 2소대로 가는거야~! 거기서 근무서다가 누가 오면 잽싸게 돌아와서 알려준다 알겠지?'
'흑... 그럼 전 못보는거 아닙니까?'
'영영 못보고 싶니?'
그렇게 불침번을 2소대로 보내놓고, 조심스레 TV를 켰다. 바로 한예슬이 나왔다~! 아~ 얼마나 반가운 얼굴인가? 그러자 자는 줄 알았던 녀석들이 침낭에서 고개를 빼곰히 내민다. 불나방같은 녀석들~! ㅋㅋㅋ
불침번도 2소대에 투입시켜 놓았으니, 나는 안심하고 보고있었다. 한참을 보고있는데, 소대원 2명이 외곽근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한겨울이라 옷이란 옷은 다 껴입고 나가야된다. 거기다가 행정반에 비치한, 방한모와 방한화도 신어야 된다. 수통에 물도 받아야되고, 후임 근무자는 연신 왔다갔다 하면서 근무준비에 여념이 없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근무자라고 생각하고는 드라마에 더욱 집중하였다. 갑자기 옆에서 같이 보던 녀석들이 쏜살같이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정말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다니, 평소에 그렇게 좀 해라~!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내무실 문 앞에서는 당직사관이 나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띠리링~♪ 고요한 내무실에 TV 끄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그러자 환한 내무실이 어두워졌고, 당직사관의 매서운 눈빛이 나를 향해 번뜩였다.
나는 침낭을 머리끝까지 덮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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