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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가 자랑하는 전주한옥마을!"
소리통신원 발대식을 마치고 우리들은 전주가 자랑하는 전주한옥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잠깐 전주한옥마을의 유래를 알아보자
을사조약 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읍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전주시민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전주한옥마을인 것이다.
"자자 설명은 그만하고 일단 먹읍시다!"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한정식집으로 들어왔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가득 차려진 반찬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득 어렸을 때, 아버지 손잡고 전주에 놀려왔다가 먹은 한정식이 떠올랐다. 그 때는 어린 나이라서 그런지 많이 먹지도 못하고 야채가 많다며 투덜거렸는데 말이다.
" 이것이야말로 진수성찬!"
처음 뵙는 분들도 많았지만 다들 블로거라서 그런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오랜 지인들과 함께하는 자리마냥 편안하게 맛있는 식사를 나눌 수 있었다. 전통 한옥에서 먹는 한정식이라 그런지 더욱 꿀맛이었다.
"한 그릇 더 주세요!"
"행복해요!"
배부르게 먹고 나니 그제서야 방안에 매달려있는 아름다운 등이 눈에 띄였다. 다음 스케쥴까지 시간이 다소 남았기에 자유롭게 전주한옥마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전동성당이 사진 찍기에 좋아요!"
전주에 거주하시는 김미림양과 윤혜림양은 이구동성으로 전동성당을 추천해주었다. 1914년에 준공되어 사적 제 288호로 지정된 전동성당은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동서양의 융합된 모습인 곡선미가 가장 아름다고 웅장하며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천년 고도 전주의 문화재인 풍남문과 경기전, 오목대, 한옥 마을과 더불어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융합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 전우치에도 등장하였답니다!"
영화 전우치를 비롯하여 박신양 주연의 영화 약속의 촬영장소였다고 한다. 전동성당은 또한 호남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당 내부의 석조 기둥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다.
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성당을 착공한 1908년에는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일본 제국의 통감부가 전주읍성을 헐었기 때문에 성당의 주춧돌은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 돌을 이용하였다. 또한 성당을 구성하는 벽돌의 일부 또한 전주읍성의 성벽에서 나온 흙을 이용하여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직접 구워 사용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다고 불리우는데 두 눈으로 직접 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본당도 구경해볼래!"
"결혼식이 한창이군!"
성당 본당로 들어가니 결혼식 뒤풀이가 한창이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을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보내고 있는 그들이 무척 부러웠다. 비록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진심으로 축복을 기원해주었다. 참고로 신부가 정말 아름다웠다.
"신랑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봐!"
전동성당의 내부 또한 아름다움의 끝을 보여주었다. 오래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서였을까? 더욱 빛나보였다. 하지만 전동성당은 대한민국 순교 1번지로서 오랜 시간 기쁨보다는 슬픔을 훨씬 더 많이 품고 있기에 왠지 모를 숙연함도 들었다.
"이 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성당을 둘러보다보니 어느새 다음 행사 시간이 다되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발걸음 재촉하였다. 성당을 나와 올라가다보면 사적 제 339호로 지정된 경기전을 만날 수 있다.
사적 제 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유형문화재 제 2호로 지정된 경기전과 유형문화재 제 16호로 지정된 조경묘가 있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태종 10년(1410년)에 창건하였다.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권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서 태조의 어용을 봉안하였으며, 태종 14년(1414년)에 건립되었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은 창건 당시에는 어용전이라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는 태조진전이라 하였다가, 세종 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하였다.
"집경전? 경주에서 못봤는데?"
아쉽게도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네 곳에 있었던 태조 어용전은 전부 소실되었다고 한다.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년) 11월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경주 집경전의 경우에는 1960년대 초까지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경주여중 교정 동편에 집경전 옛터라는 비석만 덩그라니 서 있다.
"무료입장과 예쁜 누나의 친절한 설명은 기본!"
평소 입장료를 내고 관람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기에 무료입장이 더욱 신기하였다. 시간이 많았으면 경기전 내부로 들어갔을텐데 입구에서 지나쳐야만 했기에 무척 아쉬웠다.
"타임머신 타는 기분이야!"
행사장으로 가는 내내 아름다운 전주한옥마을의 전경이 나의 발걸음을 더디게만 하였다. 다음 방문 때에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구경해봐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워~~메! 전주가 경주보다 더 나은 거 같아부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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