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지난 글보기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기상하십시오! 기상하십시오! 금일 아침점호은 06시 20분 중대사열대입니다!"
"가츠야! 밖에 비 안오냐?"
"넵! 춥기만 합니다!"
"ㅅㅂ"
군대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불침번 말번근무였던 나는 소대원들을 깨우고 간밤에 내무실 바닥에 뿌려진 물을 빗자루로 힘차게 미싱하였다. 바짝 허리를 숙여 미싱을 하는데, 주의할 점이 있다. 절대 고참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전투화에 흙탕물이 튀어서는 안된다. 어차피 잠시후 연병장에서 점호를 취하면 뽀얀 흙먼지가 묻을 테지만, 그건 자연이 하는 일이고, 임의로 후임이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로, 양 눈에 심지를 켜고 온 신경을 집중하여 미싱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아니 이것은?"
"이...이어폰이잖아!"
내무실에서 이어폰이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아니 지난 1년간 군생활을 하는 동안, 내무실에서 이어폰을 처음 보았기에 무척 낯설게 다가왔다. 가끔 운전병 아저씨들이 CD플레이어를 듣고 있는 모습은 보았지만, 우리 소대원 중에는 CD플레이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이어폰의 출처를 확인해보았다. 이어폰 선을 따라가보니, 전역을 두달 가량 앞둔 정병장이었다. 평소 사진과 음악을 사랑하는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음악은 나의 힘!"
행여 당직사관이 들어올까봐, 나는 조심스레 이어폰을 수습하여 정병장 침낭 속으로 넣어주었다. 그제서야 잠이 깬 정병장은 자신의 MP3와 이어폰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관물대로 숨겼다. MP3 또한, 군대에서는 반입이 금지되는 품목이기 때문이다. MP3에는 음악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료도 보관할 수 있는 저장매체이기 때문이다. 군에서는 허가받은 USB만 사용할 수 있고, 이 또한 특정 간부에 한해서만 소지할 수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MP3를 본 나는 그때부터 MP3 뿜뿌에 푹 빠졌다. 힘든 행군시, 야간 경계근무시, 취침시 등 MP3만 있다면 무료한 시간과 마음을 신나는 음악으로 달래 줄 수 있을테니 말이다.
"나도 MP3를 가지고 와야겠어!"
그로부터 얼마 후, 기다리던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대 전에 사용한 MP3를 찾기 시작하였다. 당시 삼성에서 나온 제품이었는데, 용량은 256MB였고 크기가 정말 작은 제품이었다. 게다가 충전하는 방식 또한, AAA건전지로만 작동되기 때문에 마치 군대에서 몰래 사용하기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어!"
그렇게 MP3를 가지고는 휴가를 복귀하였다. 그때부터 근무가 즐거워지기 시작하였다. 무료한 시간, 한쪽 귀에서는 나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군인이 되고나서 절실히 알게되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말이다.
결정적으로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건, 행군을 할 때이다.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버릴 듯한 가파른 경사를 올라갈 때,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힘이 나곤 하였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도 많았다. 갑작스런 간부의 야간순찰에 듣고 있던 MP3를 저 멀리 던지기도 하였다. 하필 던지면서 손가락에 버튼이 눌렀다. 액정화면에 불이 환하게 들어온 상태로 던진 것이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레이저 광선처럼 날아가는 꼬라지하고는!
"안녕하세요 이소라입니다! 오늘 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이런 날은 빈대떡에 막걸리가 제격인데요!
매일밤 10시에 하는 이소라의 FM 음악도시,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달콤한 꿈나라로 인도해주었다. 가끔 너무 재미있어서 끝가지 다 들어버리는 날에는 12시에 시작하는 푸른밤 그리고 성시경입니다까지 들곤 하였다. 남들 다 자고 있는 내무실에서 침낭을 머리끝까지 덮고 듣는 라디오 방송은 무척 재미있었다.
그러고보니 라디오와 얽힌 추억이 하나 더 있다. 지난 06년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였을 때, 우리부대는 추계 진지공사를 나가 있었다. 작계지역에서 텐트를 치고 2주간 생활을 하였는데, 바로 그 시기에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이다. 하루는 중대장이 다급하게 철수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지금까지 진지공사하다가 갑자기 철수한 적이 없는데?"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말입니다!"
완전무장을 한 채,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심심하여 라디오를 켰는데,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격앙된 목소리의 아나운서는 연신 쉬지 않고 기사를 코멘트하였다.
"금일 오전 10시 35분경, 북한 함경북도에서 핵실험으로 추정되는 진도 3.6 규모의 지진파가 확인되었습니다. 당국은 현재....."
"전...전쟁이다!"
"무슨 말입니까?"
"그동안 미안했어! 형이 나쁜 마음으로 그런게 아니야!"
"............"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라디오 덕분에 미리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말년 휴가를 나올 때까지 장장 5개월간을 MP3와 함께 하였다. 어찌 보면, 지루하고 따분하기 그지 없는 말년에 고마운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256MB에 담을 수 있는 곡은 기껏해야 40여곡이었는데, 5개월동안 단 한번도 업데이트를 하지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노래라도 5개월동안 매일같이 들으니 진저리가 났다.
지금도 그 때 들은 40곡은 절대 듣지 않는다!
반응형
'가츠의 군대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츠의 군대이야기, 정신교육 (175) | 2010.04.15 |
---|---|
가츠의 군대이야기, 춘천시외버스터미널 (216) | 2010.04.05 |
가츠의 군대이야기, 대공초소 (202) | 2010.03.22 |
가츠의 군대이야기, 휴대폰 (188) | 2010.03.17 |
가츠의 군대이야기, 분리수거 (168) | 2010.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