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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는 카운터로!"
당구장의 영원한 불문율이다. 아직 패배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카운터의 알바는 문혁이 손에 쥐어진 게임비를 잽싸게 가로채고는 금전출납기에 안전하게 넣었다. 승자인 정민이는 카운터 따위는 바라도 보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내가 직접 열어주는 문을 통과하며 호탕한 웃음을 날렸다. 上편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다소 상황파악이 어려우니 먼저 살펴보시면 좋겠다.
2010/02/16 - [가츠의 옛날이야기] - 가츠의 옛날이야기, 내기 上편
설날이자, 발렌타인데이라서 그런가? 시내 번화가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오후 늦게까지 자다가 나온 나는 배가 무척 고팠다. 그러나 오늘의 결정권은 정민이에게 있기에 우리들은 그가 가는대로 묵묵히 따라갔다.
"정민님! 배고파요! 밥 먹으러 가요!"
"오냐! 나를 따르라!"
잠시후, 정민이는 한 건물을 가리키며 손을 치켜들었다. 그간, 시내 쪽에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그가 가리키는 건물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없었다.
"저 곳은 무엇이옵니까?"
"오늘 이태리 남자가 되어보자꾸나! 봉쥬르!"
"그건 불어잖아!"
"어쭈! 너 먹지마!"
"봉쥬르!"
그렇게 우리는 웃으며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다가가서 보니, 건물 전체가 레스토랑이었다. 남루한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신기하였다. 아니 발렌타인데이에 남자 셋이서 간다는 게 더 신기하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잘생긴 종업원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2층에서 내려오는 종업원도 모두 훈훈한 외모를 자랑하였다. 역시 종업원도 얼굴 보고 뽑는 세상이다.
"못 생기면 알바도 못하는 더러운 세상!"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는 자리로 이동하였다. 초조해하는 문혁이와 그윽하게 메뉴판을 바라보는 정민이의 표정이 무척 대조로웠다. 메뉴판을 보니 발음하기도 어려운 메뉴들이 가득하였다.
"음... 뭐 먹지?"
"가츠야! 마음껏 시키렴! 어차피 계산은 문혁이가 할테니! 앜ㅋㅋㅋㅋㅋ"
"응! 스테이크랑 피자랑 파스타랑 샐러드랑! 가볍게 와인도 한 잔할까?"
"빠직!"
평소 쿨하기로 악랄패밀리 중에서 단연 으뜸인 문혁이였지만, 현 상황에서는 온순한 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와 정민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메뉴판을 까딱까딱거리며 폭풍주문을 하였다. 주문을 받은 종업원은 어디론가 전달을 하였다. 알고보니 1, 2층이 매장이었고, 3층이 요리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테이블 넘버 19!"
왠지 근사하였다. 우리는 설레는 기분으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주위를 둘러보니, 날이 날인만큼 죄다 커플로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애써 신경쓰지 않을려고 하여도, 커플이 우리를 보며 수군거리는 거 같았다.
"저기 재네들 우리 쳐다보는 거 같애!"
"가츠야! 새삼 왜 그래! 우리 이태리에서는 일상적인 거라구!"
"레알?"
"익숙해지면 편해!"
"스프 나왔습니다!"
남자들만 와서 불쌍하다고 여긴걸까? 종업원들이 유독 신경써서 잘 챙겨주는 거 같았다. 잘해줘도 찝찝한 이 기분! 어찌되었건, 달콤한 스프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바로 피자가 연이어 나왔다.
"받으시오!"
화덕에서 막 구워진 따끈따끈한 피자는 보고만 있어도 군침이 돌았다. 순간 사진을 포기하고 당장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고 울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야! 천천히 먹어!"
"독한 놈! 이 와중에 사진을 찍다니!"
"포기하면 편해!"
"주문하신 파스타 나왔습니다!"
신선한 해산물이 들어간 파스타가 나왔다. 평소 강한 맛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정통파스타를 즐겨 먹는 편이다. 하지만 없어서 못 먹는 거지 주는대로 넙죽 잘 받아 먹는다. 우아하게 스푼과 포크로 돌돌말아 먹었지만, 속마음은 당장이라도 마실 기세였다.
"후루룩!"
"주문하신 샐러드 나왔습니다!"
이때부터 나도 정신줄을 놓기 시작하였다. 아니 놓을 수 밖에 없었다. 맛있게 먹고 있는 녀석들의 표정을 보니, 당장이라도 다 먹어치울 기세였다. 남자들만의 식사라서 그런지, 먹을 때만큼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그저 쩝쩝거리는 효과음 뿐이었다.
"쩝쩝! 마닝 머겅(많이 먹어)!"
"주문하신 스테이크 나왔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가 위풍당당하게 등장하였다. 이건 뭐 대충 찍어도 먹음직스럽다. 뇌 속까지 점령당하는 기분이다. 이 곳에 오기를 정말 잘한 거 같았다. 내심 화끈한 승부를 펼쳐준 정민이와 문혁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는 너희들이 자주 내기했으면 좋겠어~♥"
"고기는 썰어야 제 맛이지!"
"씹어야겠지! 쯧쯧!"
부드럽게 썰리는 스테이크를 보니, 제 마음이 두근거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고민도, 걱정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거 가격이 꽤나 쎄보이는데, 문혁이가 출혈이 심할 거 같았다. 마치 스테이크의 덜 익은 부분처럼 말이다.
"나만 아니면 돼!"
"우리가 짐승남이다!"
당장이라도 꿈틀거릴 듯한 고기를 한점 베어물고는 혀를 살살 돌려 천천히 씹어 삼켰다. 그제서야 영양분이 온 몸으로 퍼지는 느낌이다. 온 몸 세포 하나 하나가 살아나는 듯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먹기만 하였다.
잠시후, 모든 요리가 뱃 속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그들의 생존여부를 확인하였다. 다행히 다들 죽지는 않았다. 정민이는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연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야아 이거 내기 한번 더 해야겠는데?"
"그럴까? 문혁아 한판 더 할까?"
"닥쳐!"
그제서야 맛있는 이태리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 우리들, 마음같아서는 매일 여행을 떠나고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다시 냉정한 현실이다. 계산을 하기 위해 문혁이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순간, 정민이가 웃으며 문혁이 뒤를 따라갔고, 카운터에 있는 사장님과 몇마디 주고 받더니, 다들 박장대소 하였다. 순간,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제서야 정민이는 우리에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여기 우리 매형 레스토랑이야!"
오 마이 갓! 그랬다. 우리가 신나게 먹어치운 곳은 정민이 매형이 운영하시는 레스토랑이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평소 내기라면 죽고 못 사는 우리들이었지만, 사실 부담이 될 정도의 내기는 가볍게 넘어가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서로의 사정을 너무 잘 아는 우리들이기에 말이다.
어느덧 그들과 함께 한 지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들은 오히려 강산만큼이나 푸르고 깊어지는 거 같다.
난 정말 너희들이 있어서 인생이 미치도록 즐겁다!
추천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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