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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3일차 오후이다. 이미 지난 이틀간 새벽까지 쉬지 않고 달린 나는 오후 늦게까지 기절 중이었다. 지난 밤, 분명히 초등학교 동창회을 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방 침대였다. 신나게 동창회를 하고 있는 와중에 악랄패밀리의 갑작스런 급습으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는 기억이 안나!"
언제나 악랄패밀리와의 만남은 스펙타클하였다. 명절이라고 다시 똘똘 뭉친 우리들, 비록 바빠서 다들 모이지는 못했지만, 너무 반가웠다. 그나마도 몇몇 친구들은 하루도 더 쉬지 못하고 올라갔다. 가뜩이나 짧은 연휴가 더욱 짧게만 느껴졌다. 여전히 비몽사몽하며 이불과 신나게 레슬링을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여...여보세요!"
"가츠야! 정신차려! 이미 해가 지고 있다구! 빨랑 나와!"
"오늘은 좀 쉬자! 내 몸에게 미안하다!"
"개뿔! 빨리 와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렴!"
"무슨 떡?"
"일단 와보면 알어!"
사연인즉슨, 미리 만난 문혁이와 정민이는 나를 기다리며 쓰리쿠션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비등비등하였다. 사이좋게 덕담을 나누며 당구를 치면 좋겠지만, 냉정한 사나이들의 세계는 언제나 내기와 함께한다. 가볍게 오천원을 걸고 게임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월등한 차이로 이겨 버린 문혁이는 정민이를 한껏 조롱하였다. 이에 울컥한 정민이는 만원을 배팅하며 잃어버린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 재도전 하였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문혁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분명히 비슷한 실력의 소유자인데, 그날따라 문혁이가 월등한 실력으로 단숨에 2연승하였다.
"우리 정민이가 완전 쩌는구나! 쯧쯧!"
"말도 안돼! 2만원 콜!"
"나야 고맙지!"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순식간에 3연패를 당한 정민이는 작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며 마지막 베팅을 걸었다. 지갑에 있는 현금을 다 긁어모아서 6만원을 걸고 올인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파죽지세로 내리 3연승한 문혁이는 기세등등하였다. 이미 그에게서 패배라는 단어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여기서 지면 끝장이야!"
한 큐 한 큐, 혼을 담은 샷으로 정민이는 4라운드를 진행하였다. 반면 이미 3차례의 승리로 여유로워진 문혁이는 집중력이 떨어졌다. 결국 4라운드에서 정민이에게 역전패 당한 문혁이는 순식간에 신세가 역전되었다. 당구내기의 무서운 점은 바로, 패자의 도전을 언제나 받아주어야 된다는 것이다.
"언빌리버블!"
지난 3게임을 모두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한판에 역전당한 문혁이는 분기충천하여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는 넘어서는 안될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10만원 빵!"
"그...그건 너무 세잖아!"
"애송이! 지금 포기하는 건가?"
"그럴리가! 덤벼라!"
여기까지가 내가 잠든 사이 일어난 일이다. 통화를 하며 작금의 상황을 전해들은 나는 부리나케 카메라를 챙겨들고는 당구장으로 질주하였다. 이미 그 곳은 평범한 동네 당구장이 아니었다. 세계 쓰리쿠션 당구월드컵이 열리는 경기장과 다를 바 없었다.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와우! 금세기 최고의 빅매치야!"
"누가 이기고 있어?"
다행히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점수판부터 확인하였다. 나는 잽싸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5라운드에서의 승자가 오늘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고로 나는 승자에게 잘 보이면 된다. 패자따윈 필요치 않았다.
점수판을 보니, 정민이가 4점차로 앞서고 있었다. 이제 그는 3포인트만 더 먹으면 오늘의 히어로가 된다. 이미 초반 3연패의 부진은 말끔히 털어내고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오호 정민이가 이기고 있구나?"
"하하 나를 따르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가츠는 누구 편?"
"정민이 편! 앜ㅋㅋㅋㅋㅋㅋㅋ"
당구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 어떤 게임보다도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모두가 즐겁게 웃고 떠드는 설연휴, 그들은 사각 당구대에서 가장 치열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행여 방해가 될세라, 조심스레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왠지 이순간, 나만 제일 행복한 거 같았다. 나도 자칫 일찍 나왔다면, 이 무시무시한 게임 속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구경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승기를 잡은 정민이는 한 마리 날쌘 표범처럼 절대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차근 차근 먹을 수 있는 공을 착실하게 포인트하며 어느덧 마지막 포인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미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문혁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 없이 당구대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오호 라스트 포인트! 정민님 파이팅!"
"동영상 돌려라! 끝내자!"
"넵! 주인님!"
사람은 모름지기 줄을 잘 서야 된다. 평소 내가 반전을 참 좋아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 이상의 반전이 없어보였다. 나는 문혁이의 등을 두들겨 주고는 정민이에게 한껏 교태를 부리며 동영상 모드로 전환하였다.
"정민님 만세! 만세! 만세!"
나는 만세삼창을 외치며 승자에게 다가가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기 바빴다.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결승전보다도, 축구국가대표 한일전보다도 방금의 경기가 훨씬 재밌고, 흥겨웠다.
"짐이 승자니라! 풍악을 울려라!"
정민이는 그동안 봐온 그 어떤 웃음보다도 해맑게 방긋 웃으며 승리를 자축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금메달을 목에 건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이랄까? 지금 이 시간, 정민이는 금메달리스트도 부럽지 않아 보였다.
한편에 다리에 힘이 풀린 문혁이는 의자에 주저앉아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항상 과도한 내기는 큰 후유증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그 어느날보다도 화끈하게 시작된 발렌타인데이, 과연 우리들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느새 밖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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