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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새벽이었다. 당시 갓 일병으로 진급한 나는 불침번 근무를 마치고 행정반에서 라면을 취식하고 있었다. 말년 병장이었던 옆소대 김병장은 행정반에서 당직근무를 서고 있는 현실을 애써 부인하며 나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김병장님 라면 한 젓가락 하시겠습니까?"
"너나 많이 드세요! 형은 집에 가서 먹을 거예요!"
다리를 힘차게 꼬고는 당장이라도 의자에 누울 듯한 기세로 앉아 있는 김병장, 그 옆에서 뜨거운 라면 국물을 호호 불어대며 맛있게 먹고 있던 나, 그때까지만 해도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그날, 우리에게 닥칠 상황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따르릉! 따르릉!"
늦은 새벽, 행정반의 정적을 깨는 전화벨이 울렸다. 이시간에 울리는 전화는 백발백중 당직사령 순찰이니 준비하라는 지휘통제실의 고마운 전우의 전화일 것이다. 아니면 현재 옆 소대에서 5대기를 하고 있기에 점검전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세를 고쳐잡고 앉은 김병장은 근무복장을 확인하고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근데, 김병장은 말년답지 않게 연신 큰소리로 네! 네! 만을 외치며 경직되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내무실 문을 열더니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하였다.
"불침번 집합!"
아무것도 모르는 불침번들은 깜짝 놀라서 행정반으로 달려왔다. 이내 김병장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불침번에게 지시하기 시작하였다.
"내무실에 있는 총기, 인원현황 다시 확실하게 점검하고 보고할 수 있도록! 아니다! 내가 직접 한다!"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아니 잊고 싶은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불과 한달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김일병 GP 총기난사사건' 있었다. 김일병은 수류탄 1발과 K-1소총 44발을 이용하여 간부포함 8명의 전우를 살해하였다. 당시, 우리는 자다가 모두 일어나서 출동준비태세를 갖추었다. 내무실로 실탄이 지급되었고, 당장이라도 유서를 작성하고 출동할 기세였다.
감히 김병장에게 대놓고 물어 볼 용기가 없었기에, 먹던 라면을 급히 먹고 내무실로 돌아왔다. 별일 아니겠지? 별일 없을거야! 그렇게 피곤한 몸을 뉘였다. 얼마나 잤을까? 아직 기상시간이 되지 않은 거 같은데, 중대는 시끌시끌하였다. 간부숙소에서 자고 있던 간부들이 모두 중대로 온 것이었다.
"기상하십시오!"
기상과 동시에 박병장은 리모콘으로 TV를 켰다. 잠시후 스포츠뉴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TV화면에는 불안간 문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지난 밤 강원도 동해시 육군 모 부대 해안초소 인근에서 3명의 괴한이 총기 및 실탄을 탈취...."
어쩐지 불안하다 하였다.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며 TV화면에 나오는 뉴스 앵커의 멘트를 집중하였다. 천만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탈취과정에서 괴한들이 칼을 사용하여 군인을 찔렀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였다. 문득, 가슴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분명 언론에서는 군 부대 총기관리 미흡이라며 신랄하게 까댈 것이 분명하다. 후폭풍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행여 과잉반응이라도 한다면 당장 민원이 제기될 것이고, 군부독재정권의 잔재라며 또 한번 신나게 비판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군인들은 항상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정신교육을 받는다.
"금일 점호 생략하고 전원 출동 준비할 수 있도록!"
소대장이 들어와서는 출동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미 사고 지역인근에는 대간첩침투작전 경계태세의 최고 등급인 `진돗개 하나'가, 강원도 전역에는 '진돗개 둘'이 발령되었다. 아마 어젯밤 행정반에 울린 그 전화가 그거였나보다. 5대기 중인 옆소대는 이미 연병장에 집합하러 군용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출동하였다.
"현재 괴한들은 서울방향으로 도주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고로 우리들은 작계지역으로 이동하여 수색, 검문을 실시할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분대장들 지시 잘 따를 수 있도록!"
검...검문이라니? 그간 산악 수색을 수차례 훈련을 통해 실시하였지만, 민간인들을 상대로 하는 검문은 처음이었다. 항상 훈련 때도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깊은 산 속으로만 기동하였기에 무척 낯설었다. 사태의 심각성은 인지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만에 부대 밖으로 나가 민간인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하였다.
"잡으면 전역할 때까지 휴가갈지도 몰라!"
그랬다! 혹시 운좋게 잡기라도 한다면, 이건 뭐랄까? 로또다! 국방부장관이 친히 와서 표창을 수여해줄지도 모르겠다. 이어 줄줄이 내려오는 포상휴가만 얼추 수십여개는 족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우리들은 두려움보다 희망과 설레임으로 가득 찼다.
"근데 저희들 작계지역까지 걸어갑니까?"
"장난해? 가다가 낙오할래?"
우리 중대 작계지역은 강원도 경계선을 넘어 경기도 가평에 위치하고 있었다. 단독군장차림으로 빠르게 걸어간다고 치더라도 족히 8시간은 걸린다. 괴한들은 승용차 중에서도 발군의 성능을 자랑하는 뉴그랜저를 타고 가는데 말이다. 잠시후 연병장으로 우리를 태우고갈 육공트럭들이 뽀얀 먼지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군용트럭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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