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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등병 때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때는 바야흐로 05년 3월, 곧 있을 훈련준비로 대대 전체가 정신없이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심이병을 따라다니며 이등병의 덕목을 부지런히 배우고 있었다. 사실 이등병에게 필요한 건 별 거 없다. 누구보다도 우렁찬 목소리와 또렷한 눈빛 그리고 엣지있는 행동만 기본적으로 해주면 된다.
"내무실 밖에서 다른 소대 고참들 만나면 우렁차게 경례해야 돼!"
"넵! 알겠습니다!"
물론, 이것도 많은 융통성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교육집합을 하기 위해 연병장으로 모이는데, 신나게 경례하고 있으면, 신나게 갈굼받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해야 될 때와 안 해야 될 때를 잘 판단하여야 한다. 물론 개중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고참들이 있어서 문제지만 말이다. 그건 그냥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지내야 한다.
"훈련 끝나고 나 휴가다! 예쁘게 짤라!"
박병장은 훈련을 마치고, 바로 휴가를 나가기 때문에 센스있게 미리 두발을 정리하고 있고 있었다. 원래 바로 자르고 난 다음은 이상하지 않은가? 미리 짤라놔야 그나마 예쁘다. 어차피 그저 한 명의 군인으로 보겠지만 말이다.
나와 심이병은 주기작업을 하고 있었다. 주기작업이란 장구류나 보급품에 계급, 이름, 소속이 적힌 레자(인조 가죽)를 붙히는 작업이다. 죄다 똑같은 보급품을 받기 때문에 쉽게 주인을 알 수 없다. 물론 평소, 자기가 쓰는 것은 딱 봐도 알겠지만, 항상 인원이 전역하고 새로 들어오기 때문에 주인이 자주 바뀐다.
그렇다고 종이나 테이프같은 거는 훈련을 뛰다보면 쉽게 떨어지기 때문에 레자에 네임펜으로 작성한 뒤, 본드로 붙인다. 문제는 붙일 보급품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총, 군장, 방탄헬멧, 탄띠, 전투조끼, 수통, 수통피, 야삽, 야삽피, 텐트, 지주핀 등등 수십가지가 되는 모든 보급품에 주기를 해야 한다. 하긴 입고 있는 팬티에도 네임펜으로 자기 이름을 적어 놓는 곳인데, 오죽 하겠는가?
"임마! 삐뚤하잖아!"
"죄송합니다!"
군대는 각이 생명이다. 보급품에 붙이는 레자의 크기는 1mm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고 통일되어야 했다. 게다가 보급품마다 크기도 각각 달랐다. 손재주가 없고, 악필이었던 나로서는 정말 최악이었다. 지켜보던 심이병은 한심하단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내가 계속 만들다가는 자신도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였는지, 이내 자신이 직접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난 심이병이 참 좋았다. 그 뒤로 다른 작업을 하면서도 나는 솔직히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괜히 어리버리 못하는 척을 종종 하였다. 그러면 어김없이 심이병이 대신 해주었다. 물론, 정도껏 해야되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에게는 최고의 선임이었다.
"가츠야 본드가 없네! 2소대가서 빌려와!"
"2소대 말입니까?"
2소대라... 우리 중대에서 2소대라고 하면 공포, 그 자체였다. 일전에도 이야기하였지만 당시 2소대장을 필두로 2소대의 전투력은 지상 최강이었다. 사단 철조망설치 최단시간 기록 보유, 연대 RCT 최우수 소대 선정, 소대 전원 포상의 주인공들이다. 이런 영광들은 가만히 놀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즐겁게 웃으면서 되는 것도 아니다. 피나는 노력과 보이지 않는 무한 갈굼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2소대에 비하면 우리 소대는 천국인 셈이었다.
사실 같은 건물을 쓰는 중대라고 하여도, 짬밥이 안될 때는 타 소대에 이유없이 방문할 수 없었다. 아니 방문하고 싶지 않았다. 가봤자 나를 귀여워(?)해주는 선임들로 바글바글할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직 혼자서 2소대를 방문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불과 10여미터 거리에 있는 2소대는 나에게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내무실을 나와 2소대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머릿속으로는 최대한 신속하고 빠르게 들어가서 나올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잽싸게 본드만 빌려서 총알처럼 탈출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 소대를 방문할 때는 보고를 해야되기 때문에 입장과 동시에 나는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이기자! 이병 가츠! 2소대에 용무있어 왔습니다!
'맙소사!"
2소대를 들어서자마자, 나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실로 참혹하였다. 나의 동기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준비태세 연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시간을 재며 닥달하는 고참들이 있었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동기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거 같았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서 있었다.
"뭐야?"
"이병 가츠! 본드 빌리러 왔습니다!"
"우리도 지금 작업하고 있으니깐, 기다려!"
"넵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저번에도 빌려가놓고, 다 쓰고 말이야! 미친 거 아냐!"
"죄...죄송합니다!"
참고로 난 이번 훈련이 첫 훈련이다. 고로 저번에 빌렸을 때는 나는 아직 자대배치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주기작업을 하고 있는 고참 옆에서 쥐죽은듯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낯선 인물이 나에게 다가왔다.
2소대 왕고인 김병장이었다. 기가 막힌 은폐술로 시체놀이를 하다가 나를 발견하더니 가까스로 일어나서는 기어왔다.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자, 흡사 좀비같았다.
"여어! 신병!"
"이병 가츠! 넵!"
"중국에서 왔다지?"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리모콘을 집더니, TV채널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곧 TV화면에서는 중국방송 CCTV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화면 속에서는 중국인 아나운서 신나게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통역 시작!"
"........."
아나운서의 빠른 멘트는 나의 중국어 실력으로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었다. 하지만 머라도 해야할 거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통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최대한 나오는 화면과 비슷하게 지어내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2소대에는 중국어를 배운 바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야! 확실해? 아닌 거 같은데?"
"확실합니다!"
처음에는 재미있고 신기해하던 김병장은 이내 싫증이 났는지, 다시 기어가서는 시체놀이를 하였다. 겨우 한숨을 돌렸는데, 이번에는 이병장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나 잘생겼지?"
"........."
산 넘어 산이다. 문득 우리 소대 박병장이 그립고, 심이병도 그립고, 심지어 조상병마저 소대원 하나 하나가 모두 그리웠다. 결국은 자신의 소대가 제일 편하였다. 이 곳은 가시방석 같았다.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옆에서 주기작업을 하고 있는 고참들은 천하태평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병장과 놀았고, 그는 떠났다.
'휴우! 무사히 넘어갔어!'
그순간, 반대편 침상에 있던 유상병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설마? 안돼! 그는 기다렸단듯이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 뿐이었다.
"나 다시 돌아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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