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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토요일 오후,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다. 동원훈련을 다녀와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불을 돌돌 만채로 밀린 잠을 자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신은 말짱한데,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여...여보세요!"
"마! 아직도 자나? 이따가 한 잔 해야지! 넘어온나!"
"아아 시러! 피곤해! 잘거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온나!"
"후회는 무슨! 나 빼고 재밌게 노셈!"
대구에 사는 친한 선배가 놀자며 극성이었다. 평소같으면, 군말없이 넘어가겠지만 당시에는 너무 귀찮았다. 나는 극구 싫다며 거절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기어이 몇시간을 더 자고서야 가까스로 일어날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냉장고로 가서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쇼파에 드러 누웠다. 그러고보니 한국시리즈 7차전이 하는 날이었다. 부랴부랴 TV를 틀어 보았지만, 주말 경기라서 그런지 이미 중계가 끝난듯 하였다.
"재방송할 지도 몰라!"
스포츠 채널을 확인해보니, 역시 3군데서 재방송을 해주고 있었다. 운이 좋은걸까? TV화면은 7회 3 : 5에서 기아가 지고 있는 가운데 역전을 할 수 있는 승부처였다. 나는 자세를 고쳐잡고 열심히 기아를 연호하며 관전하기 시작하였다. 응원을 하는데 무언가 허전하였다.
잽싸게 바베큐와 맥주를 가지고 와서는 셋팅을 하였다. 역시 스포츠 중계에는 맥주가 빠질 수 없다. 담백한 바베큐와 맥주를 연신 마시며 기아를 응원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응원이 통한 걸까? 결국 동점까지 따라 붙었다. 역시 나는 승리를 부르는 사나이다!
"아... 녹화중계구나!"
어찌됐건 지금 나에게는 생방송이랑 다를바 없다. 시원한 맥주와 맛있는 안주, 흥미진진한 야구중계까지 너무나 행복하다. 혼자 놀아도 전혀 외롭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곤 한다. 광고시간에는 MBC로 채널을 돌려 무한도전을 틈틈이 시청하였다.
다시 시작된 8회, 양팀 모두 찬스가 찾아왔지만 호수비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캐스터들은 연장승부까지 대비하여야 된다면 투수운용에 대해 중점을 두어 설명하였다. 정말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박빙의 승부였다. 불펜에서는 로페즈가 구원으로 등판하였다. 양팀 모두 사활을 건 마지막 승부였다. 다시 광고가 나오고, 나는 잽싸게 MBC로 채널을 돌리고는 바베큐를 한 점 집었다.
"기아가 한국시리즈에서 극적으로 우승했습니다. 9회말에 터진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이 기아에 12년만의 우승컵을 안겼습니다. 선수들은 서로 부둥켜 않고 감격의 눈물을 흘렀습니다!"
뭥미? TV화면에서는 무한도전이 아니라 9시 뉴스예고가 한창이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나운서는 정확하게 또박또박 속사포처럼 자신의 멘트를 다 내뱉었다. 나는 최대한 멍 때리며 멘트를 잊을려고 하였지만, 그럴수록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잠실구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ㅇ러ㅣ낭ㄹㄴ아렁ㄴ러아ㅣㄹ너!"
물고 있던 바베큐를 우걱우걱 씹으며, 부랴부랴 채널을 돌렸다. 그러나 결과를 알아버린 나에게 더이상 긴장감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비어버린 캔을 손으로 찌그려뜨리고는 공허한 눈빛으로 TV를 바라 보았다. 순간 베란다 밖에서 밝은 빛이 번쩍 거렸다.
강 건너 공원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밤하늘를 수놓은 폭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고 싶어진 나는 부랴부랴 카메라 가방을 찾으러 갔다. 가방에서 카메라와 렌즈를 꺼낸 뒤, 결합시키고는 베란다로 뛰어 나갔다. 어두워서 삼각대가 없으면 사진이 흔들릴 거 같았다.
"음... 삼각대가 필요해!"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삼각대를 찾아 가지고 왔다. 이미 불꽃놀이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는 조리개와 셔터 스피드를 설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는 터지는 폭죽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경쾌한 셔터음이 들렸고,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LCD창을 보았는데...
"ㅇ러ㅣ낭ㄹㄴ아렁ㄴ러아ㅣㄹ너!"
기껏 셋팅을 하고 찍었는데, LCD창에는 메모리카드가 없다는 경고 문구가 표시되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는 리더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리더기에 꼽혀있는 메모리카드를 뽑아들고는 베란다로 돌아왔다. 이제 터지는 폭죽의 양이 많이 줄었고, 하늘에는 뿌연 폭죽 연기만 가득 하였다.
메모리까지 삽입하고는 다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제서야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다. 몇 번 테스트를 해보고는 마음에 드는 멋진 폭죽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밤하늘에는 더이상 폭죽이 올라오지 않았다.
"끝...끝난건가?"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씁쓸하다. 차가운 강바람이 베란다를 타고 들어와 내 몸을 휘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힘 없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 위에 놓혀 있는 휴대폰을 확인하였다. 몇시간 전에 걸려온 선배의 전화가 마지막이다. 그 흔한 스팸 문자도 한 통 오지 않았다.
"오늘은 토요일 밤이잖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고장난 거 아냐?"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겨우 오후 8시였다. 하루종일 풀취침을 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고, 눈빛 또한 초롱초롱 하였다. 그런데 무척이나 심심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는 인터넷 기사를 정독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사 밑에 달린 베플을 확인하며 공감하였다.
"왼손으로 턱 괴고 오른손으로 마우스 휠 돌린 사람! 무조건 추천!"
헐! 추천을 안할 수가 없다. 재치있는 베플을 보며,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순간, 고장난 줄만 알았던 휴대폰이 힘차게 울리기 시작하였다. 발신자 정보를 확인해보니 동기 녀석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제 슬슬 출동할 시간 임박한 거였다. 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그래! 어디로 가면 되노?"
"뭔소리야? 너 지금 컴퓨터 앞에 있지?"
"응! 어떻게 알았어?"
"잘됐군! 롯데시네마 들어가서 영화시간 좀 확인해줘! 지금 데이트 중임! 후훗!"
"ㅇ러ㅣ낭ㄹㄴ아렁ㄴ러아ㅣㄹ너!"
영화시간과 잔여좌석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베플 보는 재미도 무의미하였다. 담배를 한 개비 물고는 베란다로 나갔다. 허공에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밤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에는 그 흔한 별 조차도 하나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누가 챙겨 줄 때 감사해하며 나가야 된다는 사실을...
추천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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