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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사랑니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밤만 되면 어김없이 치통이 찾아왔다. 초저녁에 일찌감치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머리맡에 놔둔 휴대폰이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하였다.
시간은 벌써 자정이 훌쩍 넘었는데, 도대체 이 시간에 전화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액정확면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무릎을 꿇고 전화를 받았다.
"가츠야 자나? 모하고 있노! 후딱 나온나! 오늘 아니면 못 본다!"
"아나! 지금 자다가 어떻게 나가? 씻지도 않았어!"
"니는 씻으나 마나야! 어차피 여자도 없어! 빨리 나와!"
"그럼 더욱 더 나갈 이유가 없잖아! 우울해!"
늦은 새벽에도 잊지 않고 찾아 주는 친구의 배려에 깊은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기위해 주섬주섬 옷을 걸치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눌린 머리를 가리기 위해 까만 모자도 착용하였다. 어째 패션이 영 칙칙하다. 자다 깬 몰골은 마초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어차피 새벽인데 보는 사람도 없을거라 생각하고 나갔다.
차를 몰고 친구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였다. 다들 바빠서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겨를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만나야 하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차를 가지고 나온터라 술을 자제하였다. 어차피 사랑니 때문에 먹을 수도 없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창문을 열고 담배를 하나 물었다. 제법 차가운 새벽공기는 나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따금 찾아오는 사랑니의 통증으로 인해 나의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쓰으으읍! 아프다! 어흐흑흑ㅜㅜ"
넓은 도로에는 앞서가는 택시 한 대 밖에 없었다. 나는 평소 운전을 할때 택시를 졸졸 따라가곤 한다. 그들은 언제나 가장 빠른 루트를 통해서 이동하기에 그냥 묵묵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새벽이라 그런지 택시는 제법 빨리 달렸다. 나도 놓칠세라 액셀레이터를 밟으며 뒤따라 붙었다. 다리에 진입하는 것을 보니, 나랑 가는방향이 같은 거 같다.
집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주차할 곳이 걱정되었다. 이시간이면 분명히 지하주차장이고 할 것 없이 차량들로 꽉 차 있을 것이다. 그냥 집 앞 강변에 세우고 걸어가는 것이 속 편하였다. 아파트 진입로 앞에 택시가 정차하였다. 마침 택시가 정차한 바로 뒷쪽에 주차할 공간이 있었다.
"나이스!"
나는 잽싸게 택시 뒤로 다가가서 주차를 하였다. 원샷주차는 남자의 로망이 아닌가! 나는 한 큐에 주차를 마치고는 차에서 내렸다. 택시 뒷좌석에서도 한 여성이 내렸다.
그녀의 뒤태를 보니 제법 큰 키에 볼륨감있는 몸매를 소유하였다. 패션도 우리 동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엘레강스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이었다. 시신경에서 보내주는 정보는 총알과 같이 뇌로 전달되었고, 167/53이라는 결과를 산출해내었다. 그녀의 걸음걸이을 보니 심하게 술에 취한 거 같지는 않았다. 도도하면서도 당당하게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내가 너무 짐승같이 분석한다고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매력적인 이성에게 눈이 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본능이다! 떳떳한 자! 나에게 돌을 던져라!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그녀도 나와 방향이 같은가보다. 본의아니게 그녀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문득, 치한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추근거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정의의 사도처럼 나타나서 그녀를 구해줄텐데 말이다.
그러나 어두운 인도에는 그녀와 나, 둘 밖에 없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나의 얼굴을 연신 강타하였다. 아픈 사랑니가 바람을 맞으니 욱신욱신하였다.
"쓰으으읍! 짱나!"
나는 혼자 고통을 호소하며 투덜거렸다. 앞서가던 그녀는 나의 존재가 신경이 쓰이는지 잠시전 당당하던 워킹은 사라지고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하긴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강바람은 더 세차게 불기 시작하였다. 빨리 집에 가서 블로그에 올릴 글을 작성해야 된다는 마음에 초조해졌고, 그녀를 따라 잡아버리면 서로 마음이 편할 거 같았다.
성큼성큼 보폭을 크게하여 걷기 시작하였는데, 그녀도 덩달아 빨리 걷기 시작하였다. 이건 뭐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그런 시추에이션이 아닌가? 졸지에 치한 취급을 받니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빨리 뛰어버릴까? 근데 저 여자도 뛰어버리면 진짜 묘해지겠다. 그때 정적을 깨며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가츠야 애들 집에 가다가 아쉬워서 한잔 더 하자는데?"
"안돼! 지금 할 일이 있어! 바쁘다구! 짤라!"
빨리 가서 아침에 올릴 글을 작성해야 된다. 그나저나 그녀는 혼자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이제는 거의 속보 수준이다. 그리고는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하였다. 설마 경찰에 전화하는 거는 아니겠지? 이시간에 전화를 받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역시 통화가 되지 않나보다. 다시 가열차게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좀 웃기기는 하지만, 아니 그녀는 지금 혼자만의 목숨을 건 사투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우리집에 다왔다. 저기로 들어가면 되는데..... 그녀가 잽싸게 먼저 들어가버렸다. 뭐지? 우리 라인에 사는 사람인가? 본 적이 없는데, 문득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였다. 이웃에 사는 미모의 여성들은 이미 나의 레이더에 포착되어 있는데, 도대체 당신은 누구란 말인가?
입구에서 보니 음침한 엘리베이터 앞에 그녀가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면 진짜 소리치는 거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집인데 안 들어가기도 이상하다. 별수없이 한껏 선량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그녀는 손에 휴대폰을 꼭 쥐고는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하고 있었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녀와 나는 사이좋게 탑승하였다. 그녀는 한껏 나를 경계한 채로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의 섬섬옥수는 조심스레 6층을 눌렀다. 6층? 6층이라... 6층에 사는 사람은 내가 다 아는 사람들인데, 그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얼레? 분명히 낯익은 얼굴이다! 6층에는 초등학교 때 나랑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다소 통통한 체격에 선머슴같은 성격을 지녔던 그 아이는 여자들의 리더였다. 항상 여자들을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을 직접 응징하고 다녔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가녀린 그녀가 바로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중학교 이후로 보지 못했으니 거의 10년만이었다. 갑작스런 나의 돌발행동에 놀란 그녀는 한껏 움츠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가츠잖아!"
"우와 너 완전 예뻐졌어! 못 알아보겠는데?"
"아씨! 너어 치한인 줄 알았잖아! 꼴이 그게 뭐야! 요즘 힘들어?"
"..........."
그녀는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데, 추석연휴가 너무 짧아서 못오는 바람에 월차를 내고 잠깐 내려 온 거라고 하였다. 예전의 통통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저 늘씬하고 아름다웠다. 금방 엘리베이터가 6층에 도착하는 바람에 긴 대화는 못 나누웠지만, 반가운 만남이었다. 그녀는 다시 도도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인사를 하였다.
"잘가 치한!"
추천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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