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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표 부쳐야 되니깐 내일까지 편지봉투 제출할 수 있도록!"
때는 바야흐로 97년, 중학교 2학년 때이다. 지난주에 본 기말고사 성적이 발표되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저자인 장승수님께서 공부가 가장 쉽다고 하셨지만, 당시의 나는 노는게 가장 쉬웠다. 학교에 가면 공부보다도 친구들을 만나는데 주 목적이었다.
수업시간에는 교과서에 교묘히 숨긴 만화책을 보았고, 쉬는 시간이 치면 친구들과 모여 판치기라 불리우는 동전 따먹기를 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당연히 성적이 잘 나올리가 없었다. 시시각각 교실로 배달되는 과목별 성적을 확인하며 한숨을 쉬었지만, 이미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대충 종합해보니, 중간고사보다 석차가 현저히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이번 겨울방학에도 예전에 소개한 여름방학편에서처럼 합숙학원에 강제로 입소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밀려 왔다.
"두번 다신 그 곳에 가고 싶지 않아!"
나는 그간 사용하지 않았던 두뇌를 가열차게 돌리기 시작하였다. 교실 뒷 편에 붙여 있는 성적표를 보자 불현듯 묘안이 떠올랐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성적이 떨어져서 우울해 하고 있는 양수가 보였다. 사실 혼자서 해도 충분하지만, 같이 하는 동지가 있으면 한결 든든하지 않은가?
양수를 불러서는 나의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나의 계획은 성적표를 위조하는 것이었다. 똑같이 위조하여 부모님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한참동안 나의 설명을 듣던 양수는 다소 긴잘한 표정으로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가츠야 그게 가능해?"
"너만 도와준다면 충분히 가능해!"
"내가 할 일은 뭔데?"
"일단, 성적표 용지가 있어야 되겠지? 성적표 용지가 어디 있겠어?"
"음 컴퓨터실에서 프린트하니깐 당연히 컴퓨터실?"
"빙고! 점심시간에 나랑 같이 컴퓨터실에 가서 용지를 몰래 빼내와야 돼!"
그렇게 우리는 점심을 잽싸게 먹은 뒤, 2층 구석에 위치한 컴퓨터실로 침투하였다. 다행히 선생님들께서 성적표를 출력하기 위해 자주 들락날락 거리셔서 그런지 잠겨 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들 식사하러 가셨는지 아무도 없었다.
"망 잘 보고 있어!"
"나만 믿어!"
나는 제비처럼 날아서 컴퓨터실로 들어갔다. 프린트기가 있는 책상으로 가서 아랫쪽 서랍을 열어 보았다. 역시나 파란 성적표 용지가 박스채로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여유있게 한 움큼을 쥐고는 조심스레 뜯었다. 그리고는 교복 앞으로 집어 넣고는 컴퓨터실을 빠져 나왔다.
망을 보던 양수에게 휘바람을 한번 불어 주고는 부리나케 교실로 뛰어 갔다. 세상을 다 가진 거 마냥 즐거웠다. 가방에 빼내온 성적표 용지를 조심스레 넣어 두고는 다음 작전을 계획하였다.
"제일 중요한 용지는 확보하였어! 이제 다음 작전을 펼쳐야 된다!"
"뭔데?"
"성적표에는 성적 말고도 중요한 담임선생님 도장이 있잖아!"
"그렇군! 그건 어떻게 찍어?"
"어차피 땅문서도 아닌데, 형식만 갖추면 돼! 잘봐!"
"왼쪽이 제대로 찍은 거고, 오른쪽은 살짝 비틀어 찍은거야!"
"오오! 넌 천재구나!"
그렇게 모든 준비는 끝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컴퓨터를 부팅하고는 성적표 용지에 맞게 문서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정확한 위치에 성적을 집어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만지고 나서야 정확한 위치에 프린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기존의 성적보다 월등히 올라간 성적을 대입하기 시작하였다. 반석차와 전체석차, 평균을 꼼꼼히 계산하여 하나하나 타이핑하였다. 문득 연습장에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딱했다. 차라리 이렇게 공부를 하였으면 이 고생을 안해도 될텐데 말이다.
얼마후, 상위권으로 치솟은 나의 성적표가 완성되었다. 센스있게 양수는 바로 내 밑으로 랭크해주었다. 성적표를 확인하고 뿌듯해 할 녀석을 생각하니 즐거웠다. 다음날 학교를 등교하자마자 양수에게 빛나는 위조 성적표를 건네 주었다.
"너의 겨울방학을 안락하게 해줄 성적표다!"
"너를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야!"
잠시후,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시더니 편지봉투를 제출할라고 하였다. 혹시라도 담임선생님께서 주소를 확인 할까봐 제대로 된 주소를 적어 놓았다. 어차피 부모님의 퇴근시간보다 내가 더 빨리 집에 도착하니 그때 회수하면 되니깐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위조된 성적표를 넣은 편지봉투도 우체통에 고이 넣었다. 이제 우체부 아저씨만 기다리면 된다. 며칠동안, 수업을 마치자마자 총알같이 집으로 뛰어갔다. 3일째 되는 날, 편지함에 2통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한 통은 원본 성적표가 담긴 편지봉투, 또다른 한 통은 위조한 성적표가 담긴 편지봉투였다. 원본 성적표가 든 편지봉투만 회수하여 집으로 가지고 왔다.
"아쉽게도 너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원본 성적표를 갈기갈기 찢은 채 베란다에서 바람에 날려 보냈다. 이제 부모님이 오시기만 기다리면 된다. 잠시후, 어머니가 위조된 성적표를 들고는 집으로 들어오셨다. 아들의 성적이 어찌나 궁금하신지, 그새를 참지 못하시고 엘리베이터에서 개봉하셨나보다. 그러나 성적표에는 자랑스런 아들의 우월한 성적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시고는 연신 기특해 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해주신다며 요리를 하시느라 분주하셨다. 이어 아버지도 퇴근하여 오셨고, 어머니는 주방에서 뛰어나오시며 자랑하셨다.
"여보! 우리 아들이 나를 닮아서 똑똑하네! 호호!"
"말은 똑바로 해야지! 머리는 나를 닮았지! 하하!"
얼마만에 찾아온 가정의 평화인가? 즐거워 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무척이나 불편하였지만 그래도 좋은게 좋은거라 생각하였다. 3학년 되면 열심히 공부해서 제대로 된 성적표로 즐겁게 해드려야지라고 다짐도 하였다.
그렇게 나의 세상이 이어져갔다. 집에서도 늦은 밤까지 마음껏 컴퓨터를 할 수 있었고, TV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께서 늦게 오신다고 하여, 아버지와 저녁을 시켜 먹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어머니께서 들어 오셨다. 유난히 상기된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야이 문디자슥아! 이제 하다하다 성적표를 위조해? 오늘 니 죽고 내 죽자!"
어머니께서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나의 성적에 기뻐하시며 선생님과 상담을 할 겸, 저녁식사를 드시고 오신 거였다.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 먹을 듯이 달려드시는 어머니를 피해다녔다.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래 어머니한테 맞는 거라면 버틸 수 있다. 일단 흥분하신 어머니를 진정시켜야 된다는 생각으로 연신 빌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안방에서 다시 나오신 아버지, 그의 손에는 기다란 허리띠가 들려 있었다. 순간, 아버지의 취향이 의심스러웠지만, 의심할 시간도 없었다. 사정없이 내 몸을 향해 파고드는 허리띠를 막으며 도망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버지는 서부의 무법자 마냥, 사정없이 나를 향해 채찍질 하였다. 더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살려주세요! 어흐흑흑ㅜㅜ"
잠시후,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는 진심어린 반성을 하며 부모님 앞에 무릎꿇고 있었다. 겨울방학기간동안 컴퓨터 사용금지, TV시청 금지, 용돈 동결 등 수많은 페널티이 나에게 부과되었고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묵묵히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일단락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간과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는 한 남자, 우리는 그를 담임이라 읽고 악마라고 쓴다!
추천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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