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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해보다 유난히 짧은 추석연휴, 마음같아서는 그동안 쌓인 피로를 푹 쉬면서 풀고 싶지만, 오늘도 우리들은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전쟁에 발을 담근다. 우리들은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곳에 가면 항상 자식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루시는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이 있다. 또한, 평소 먹지 못하는 산해진미가 우리를 반겨준다.
"가자 고향으로~!"
어릴 때는 명절이 참 좋았던 거 같았다. 8남매이신 아버지덕분에 항상 귀여워 해주시는 할머니와 큰아버지, 고모내외, 사촌 형과 누나들, 언제나 할머니 집에는 북적북적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전형적인 시골의 아궁이에는 대가족이 먹을 곰탕이 뽀얀 김을 내며 끓고 있었고, 마당에는 고모와 어머니가 전을 부치시는라 분주하였다.
나는 형들을 따라 다니며 폭죽놀이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나와 내 동생은 언제나 막내였다. 그래서일까? 형들은 항상 나를 잘 챙겨주었다. 집에서는 장남으로 커왔던 나로서는 든든한 형들의 존재가 정말로 좋았다.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달콤한 연휴일수록 금새 끝난다. 다시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헤어지는 날이다. 거리순에 따라 아침부터 아쉬운 이별을 한다. 서울에 사시는 큰아버지 가족이 떠나시면, 다들 집 앞 삼거리까지 나와 배웅을 한다. 이제 헤어지면 내년 설이나 되어서야 만날 수 있기에 아쉬움은 더 크다.
그렇다고 아쉬움만 있는게 아니다. 아쉬움을 상쇄시켜주는 달콤한 용돈이 있다. 오랫만에 만나는 조카들에게 다들 용돈을 챙겨주시느라 바쁘다. 8남매다 보니 딸린 조카들의 수도 어마어마하여 부담도 적지 않지만 어머니께서는 항상 고향으로 가기 전에 은행에 들려 신권을 준비하셨다.
"우와 우리 엄마 부자다!"
"데끼! 사촌 형이랑 누나들 용돈 주는거야!"
"나도나도 주세요!"
"아들! 넌 열심히 받아와야지! 이거 좀 불쌍한 옷 입혀야겠는데!"
"싫어! 새 옷 입을거야!"
"너무 부티나잖아! 이거 벗어!"
"........."
어머니께서 아무리 많은 돈을 뿌려도 나와 동생이 열심히 회수해오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용돈을 조카들에게 챙겨주셨다. 귀하고 사랑스런 조카들을 평소에 많이 챙겨주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용돈으로나마 마음을 전하는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점점 진화하고 있었다. 어릴 때는 돈의 개념도 몰랐고, 오히려 손에 들고 있는 지폐가 거추장스러워서 막 버리고 다녔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화폐의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였고,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고 있었다. 맛있는 거를 사먹을 수 있고, 갖고 싶은 게임기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명절때 받는 용돈은 언제나 저축이라는 명목하에 어머니 지갑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그러나 내이름으로 된 통장 한 번 구경해본 적 없었다. 십수년의 경험으로 인해 어머니의 지갑으로 들어가면 끝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난 이제 바보가 아니야!"
작별시간이 되자, 큰어머니 , 고모들은 조카들을 찾아다니며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느라 분주하였다. 우리 어머니도 사촌형들에게 용돈을 나눠주시고 있었다. 나는 동생 손을 꼭 잡고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서 있었다. 내심 고모가 착각하여 두번 주면 좋겠다! 라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말이다.
"아이고 우리 가츠! 엄마 잘 듣고, 동생 괴롭히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야 돼!"
"넵!"
"이거 동생이랑 맛있는 거 사먹고, 설날에 또 보자!"
"감사합니다!"
나는 어린 동생 몫까지 열심히 받았다. 가끔 학년별로 만원, 5천원 나눠서 주시는데 그러면 곤란하다. 조카를 나이로 구분해서는 안된다. 엄연한 인격체로 봐주어야 한다. 훈훈한 시간이 끝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할머니가 챙겨주신 먹거리를 차안에서 먹으며 문득, 내일부터 학교가야된다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조수석에 타신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서 매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그리고는 받은 용돈을 들고 있으면 잃어버리니깐 지갑에 넣어두자고 하신다. 레파토리라도 좀 바꾸지! 항상 똑같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다음주에 발매되는 심시티2000이라는 최신 컴퓨터 게임을 사기위해 한달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린 추석이었다.
"숨겨야 돼!"
나는 어기적거리며 만원짜리 4장을 어두운 좌석아래로 떨어뜨렸다. 용돈을 건네 받으신 어머니는 세시더니 약간 의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말씀은 하시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차 안, 아버지는 묵묵히 운전을 하셨고, 피곤하신 어머니는 이내 잠이 들었다. 나는 좌석 아래 떨어진 지폐를 다시 줏어서는 바지주머니에 깊숙히 넣었다.
어린 동생은 이런 나를 보더니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이를려고 하였다. 나는 동생의 입을 틀어막고는 온갖 과자로 유혹하였다.
"나 혼자만 살자고 이러는게 아니잖아!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야!"
오랫만에 돌아온 우리집,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는 집안 정리를 하시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와 동생은 방으로 들어가 빼돌린 용돈을 안전하게 숨길만한 곳을 찾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고민하는데, 책꽂이가 눈에 띄었다.
"책 속이라면 절대 못 찾을거야! 안그래?"
"응!"
책 속에 안전하게 숨기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일주일만 참으면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게임을 할 수 있다. 꼭 이럴때는 시간이 안간다.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다. 매일밤 숨겨놓은 용돈을 확인하며 달콤한 꿈나라로 들어갔다.
며칠후,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동생을 꼬옥 안으시고는 드라마를 보고계셨다. 나는 배고프다며 밥을 달라고 징징거렸다. 그러자 요리하시기 귀찮으셨는지, 시켜먹자고 하였다.
"그럼 탕수육 먹어도 돼?"
"응 시켜!"
"오오오! 왠일? 비싸잖아!"
"안 먹은지 꽤 되었잖아! 괜찮아 시켜!"
잠시후 따끈따끈한 탕수육과 자장면, 군만두가 배달 되어 왔고, 굶주린 나는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거실바닥에 용돈을 숨겨두었던 책이 내팽개쳐져 있다는 사실을...
추천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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