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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보기
오늘은 일병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때는 바야흐로 05년 7월, 점심무렵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였다. 금새 그칠 것만 같았던 빗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졌고, 우리들은 산 속에서 물에 빠진 생쥐마냥 흠뻑 젖어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주둔지로 조기 복귀하거나 잠시 중단하였을 법도 한데, 당시에는 KCTC라는 큰 훈련을 앞두고 있었기에 강행하였다.
"아나 미친거 아냐? 비가 이렇게 오는데 무슨 훈련이야?"
"아흑 총이 녹슬고 있어요!"
판초우의를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이미 방수효과는 제로였다. 팬티는 물론이고, 전투화를 신은 발까지 물기로 촉촉히 젖었다. 당장 비 맞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복귀 후 정비를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하였다. 물에 젖은 전투복부터 시작해서 각종 장비를 정비할 생각을 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군대는 단 한 개의 보급품만이 존재한다. 여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바로 정비를 하여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여야 한다. 군장, 텐트, 지주핀, 방탄모, 전투조끼, 탄띠, 야삽, 수통등 무수히 많은 장비는 이미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당시 나의 계급은 갓 진급한 일병, 죽도록 일만 하는 대한민국 공식 일꾼이었다.
"복귀 후, 나의 미래가 그려지는 걸 후훗!"
비를 맞으며 저녁식사를 먹고 있는데, 분대장이 투덜거리며 돌아왔다. 야간 방어까지 다 하고나서야 복귀한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패닉상태였다. 숲이 우거진 깊은 산 속에서 작은 비는 어느정도 커버가 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커버할 수 없었다.
2인 1조로 비닐봉지에 밥을 담아서 먹고 있는데, 자동으로 물 말아 먹는 밥이 되었다. 그래도 먹어야 산다. 우리들은 허겁지겁 밥을 먹고는 야간 방어를 위해 준비하였다. 간부들과 고참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진대로 날카로운 상태였기에, 특히 조심하여야 했다. 분대장의 지시에 따라 각자 맡은 방어 위치로 이동하였다.
다행히 나는 심일병과 한 조였다. 나의 맞고참 심일병은 이미 힘든 이등병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함께 하였기에 편하고 좋았다. 이미 진흙범벅이 되어버린 호안에서 우리는 비를 맞으며 사주경계를 하고 있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과연 무사히 이곳까지 공격하러 올라올 수 있을까? 온다치더라고 비명지르고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올 것이 뻔하기에 방어에 대한 긴장감도 떨어졌다.
"심일병님! 이거 너무 하지 말입니다?"
"언제 우리가 그런거 생각하고 살았냐"
"아나! 담배 한 대 펴도 되겠습니까?"
"언제 니가 그런거 물어보고 폈냐?"
저녁시간 때는 비때문에 빨리 정리하느라 식후땡을 하지 못했다. 나는 전투조끼에 넣어둔 담배를 주섬주섬 꺼내고는 입에 물었다. 이미 필터부분은 죄다 물에 젖어서 눅눅하였다.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킬려고 하였는데, 물에 완전히 젖어서 그런지 아무리 부싯돌을 돌려도 불꽃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묵묵히 돌리고 또 돌려보았지만, 결국 불을 켜지지 않았다. 문득, 훈련 나오기전 훈련준비를 하던 김상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훈련기간 중에 필 담배를 반합에 따로 챙기고는, 가지고 다닐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지포락에 애지중지 보관하였다. 흡연할 때마다 불편하게 넣었다 뺐다 해야될텐데, 왜 사서 고생하나 싶었다.
"김상병... 천재였어!"
이제서야 김상병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후회해봤자 늦었다. 나는 켜지지도 않는 라이터를 가지고는 연신 돌리고 있었고, 이런 나의 모습의 본 심일병은 한심하단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야 차라리 김상병님한테 갔다와! 우리 옆에 있는 호에 계시잖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뭘 새삼스레 계속 물어봐! 계속 착한 척하네!"
역시 심일병은 천사였다. 나는 방어 중이던 호를 빠져나와 김상병이 있는 호로 조용히 다가갔다. 약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상병의 호, 그곳에는 윤이병도 있었다. 행여 소대장이 눈치 챌까봐 최대한 기도비닉을 유지한 채 접근하였다. 김상병은 윤이병을 붙잡고 연신 노가리를 까고 있었다.
당시 윤이병은 전형적인 관심병사 모드로 일관한 시절이었다.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모든게 연기였는데 말이다. 김상병은 윤이병에게 썰렁한 농담을 하며 혼자 껄껄거리고 있었고, 윤이병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김상병님!"
"아나 깜짝이야! 왜 왔어?"
"라이터 좀 빌려주시면 안됩니까? 어흐흑흑ㅜㅜ"
"쯧쯧! 준비성 없는 색히! 넌 담배 필 자격도 없어!"
김상병은 건빵주머니에서 지포락을 꺼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라이터의 불을 켰다 꼈다 하며 만지막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잔인한 녀석!
"맨입으로?"
"복귀하면 오징어짬뽕면 칼셋팅해놓겠습니다!"
"소세지는?"
"절 뭘로 보시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참치캔도 들어갑니다!"
그제서야 김상병은 쥐고 있던 라이터를 나에게 던져 주었다. 근데, 애매하게 던졌다. 김상병보다 높은 곳에 있던 나에게 턱없이 낮게 던진 것이다. 라이터는 올라오다 말고 힘을 잃고는 다시 호 안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물이 가득 고인 부분에 제대로 잠수하였다. 이건 뭐 어쩌자는거야?
저게 수류탄이었다면 우린 죽었군! 나는 한심하단듯이 김상병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그는 나의 고참이다. 윤이병이 잽싸게 줏었지만, 이미 젖은 라이터는 더이상 불이 켜지지 않았다.
김상병은 윤이병이 줏은 라이터를 멍하게 바라 보고는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하지만 딱봐도 지 잘못이라는 걸 알기에 머라고 하지 않았다.
순간, 나의 방탄모를 순간 탁! 쳤다. 놀라서 돌아보니 이병장이었다.
"가츠 여기서 머해 임마? 담배 있냐?"
"네 그렇습니다!"
아나 이것들~! 죄다 하라는 방어는 안하고 담배 타령이다. 이병장은 담배를 구하러 온 것이다. 잽싸게 담배를 꺼내서는 홍병장에게 건네 주었다. 담배를 받은 이병장은 주머니에서 삐까번쩍한 지포라이터를 꺼내더니 멋있게 불을 붙혔다.
띵~♪
경쾌한 지포라이터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역시 군대에서는 지포라이터가 최고다! 군인들이 지포라이터를 좋아하는 이유가 다 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미 육군 중사 안드레즈는 적군의 총알에 가슴을 맞았으나, 윗옷 주머니에 넣어둔 지포 라이터 덕에 목숨을 구할수 있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총 맞을 이유가 없으니, 바람이 심한 날이나 비 오는 날에도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아하였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이병장을 바라 보았고, 나의 눈빛을 읽었는지 나보고도 한 대 피라고 하였다. 그날 핀 담배 한 개비는 유난히 맛있었다.
얼마후, 정기휴가를 나갔다가 복귀한 나의 주머니에는 신상 지포라이터가 빛나고 있었다. 나의 지포라이터를 본 김상병은 부러워하며 말하였다.
"어디 일병나부랭이가 지포라이터야! 완전 무개념이구만! 일로와 일로와!"
"모두가 사는 길이지 말입니다!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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