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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병때 겪었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예전 글을 안 읽으시고 바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윗부분에 위치한 지난 글보기를 이용해주세요!
때는 바야흐로 05년 12월, 당시 가츠는 상병진급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일병 계급장을 벗어버리고 상병 계급장을 다는 것이다. 1월 1일이 상병 진급날이지만, 대개 진급하기전 주말에 종교행사를 갔다오면서 오바로크를 친다. 고로 나도 미리 전투복 한 벌과 예비 전투모에다가 상병 오바로크를 쳤다.
전투복에 달린 상병 계급장을 보니 정말 감개무량하다. 지난 1년, 고난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하하~! 이제 나는 대한민국 육군 상병이야~! 뭘해도 각이 딱 나오는 상병말야~! 그렇게 전투복을 어루만지며 즐거워 하였다.
'가츠일병님~! 미리 축하드립니다~! 아니 가츠상병님~! 앜ㅋㅋ~!'
'하하하~! 이놈아~! 아직 일병이야~! 다시 말해봐~!'
'가츠상병님~♥'
'우헤헤헤헤~!'
바깥세상은 연말이라고 다들 들떠있다. TV를 보니 각종 시상식으로 한껏 연말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군대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이시기에는 훈련도 안잡혀있기때문에 평화롭다~! 너무 편해서일까? 아니면 상병진급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걸까? 나는 나태해졌다. 평소같으면 꼬박꼬박 빨래를 할텐데, 딱히 훈련도 없고, 겨울이다보니 크게 땀흘릴 일도 없고, 무엇보다도 귀찮았다. 어느덧 빨랫감이 가득 쌓여있었다.
'아 빨래하기 겁나 귀찮어~! 손도 시렵고, 새해가 밝으면 하자~! 후훗~!'
그렇게 나는 관물대 뒤 창가에 차곡차곡 빨랫감을 쌓아놓았다. 일과시간이 끝나고, 여유롭게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2소대에서 이등병이 전파사항을 전하러 들어왔다.
'이기자 사랑합니다~! 금일 점호는 내무사열이랍니다~!'
아나~! 이 평화로운 연말에 무슨 내무사열이야~! 당직사관 누구야~! 2소대장님이시다. 사실 2소대장님은 전 2소대장님에 비하면 천사 그 자체이다~! 다만 가끔 엉뚱하셔서 문제지만 말이다. 말년병장들은 투덜거리며 TV를 계속 보았고, 분대장들은 내무사열를 대비하여 소대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였다.
'오늘 내무사열이니깐 청소 확실히 하고 , 개인위생도 철저히 하고, 빨래 같은거 짱박아놓지말고, 관물대 정리도 하고~! 암튼 평화로운 연말에 지적사항 안 나오게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영광스런 나무관물대를 아직 사용하고있는 우리부대, 딱봐도 각은 다 흐트러져있고, 지저분하다. 갈굼먹기 딱 좋은 상태이다. 소대원들은 너도나도 관물대 정리에 분주하였다. 전투복들을 다꺼내서 다시 각잡고, 장구류도 차곡차곡 이쁘게 정리하였다. 정리를 하다가 밀린 빨래가 보였다.
'아나~! 주말에 할려고 했는데, 이거 언제 다하지? 아나 귀찮아 죽겠네~!'
나는 빨랫감을 들고 세면장으로 갔다. 보통 빨래는 세면장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손빨래를 한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은 그마저도 겨울이라 부족하여, 졸졸거리면서 찔끔찔끔나온다. 빨래를 하다보면 정말 속터진다. 세면장으로 가는 길에 문득 세탁기가 눈에 들어온다.
100여명이 사용하는 중대에 세탁기는 총 2대가 있다. 그것도 천원을 넣고 사용하는 동전세탁기이다. 건조기도 2대가 있다. 역시 천원~! 그마저도 밥이 안되면 좀처럼 사용할 수 없다. 처음 자대배치 왔을때만 하더라고 병장들의 전유물이었는데, 그나마 요즘에는 상병까지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일,이등병도 사용할 수 있지만, 좀처럼 눈치보여서 사용할 수 없다. 가끔 고참이 빨래할때 꼽사리껴서 같이 돌리는게 전부였다.
그날따라 세탁기가 텅 비어있었다. 비어있는 세탁기의 유혹은 정말 치명적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주머니에 거짓말처럼 천원짜리 지폐가 한 장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세탁기 같았다.
'그래 어차피 낼모레면 상병인데~! 후훗 귀여운 것~! 돌려주마~!'
들고있던 빨래를 넣고도 많이 남았다. 나는 내무실로 들어가서 방한용품과 낼모레입을 상병계급장이 부착된 전투복도 가지고 나왔다. 후훗~! 완벽해~!
보통 세탁기는 1시간정도 돌아가고 건조기는 40분정도면 된다. 현재시간 오후 6시 30분, 점호전까지는 충분하다. 세탁기를 가동시키고는 내무실로 돌아왔다. 고참들과 장난치며 평화롭게 TV를 보면서 청소시간을 기다렸다. 1시간후, 세탁기가 다 돌아갔어야 하는데, 여전히 돌고 있다.
뭐가 문제일까? 가서 살펴보니, 물이 잘 안나온다. 콸콸 나와서 헹굼도 하고 해야되는데, 좀처럼 물이 찔금찔금 나오니깐 평소 예정시간보다 훨씬 지체되는 것이다. 아 이거 난감한데... 에이 모르겠다 머 언젠간 돌아가겠지~! 그렇게 내무실로 돌아와서는 점호청소를 실시하였다.
어느때보다 깔끔하게 청소를 하였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우리는 침상에 앉아서 점호를 실시하였다. 당직사관은 2소대부터 내무사열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갖춰도 언제나 지적사항은 나온다. 2소대에서 연신 깨지고 있다.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야~! 우리는 지적사항 나올만한거 없지?'
분대장은 연신 내무실을 점검하면서, 2소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하였기에 내무실은 최적의 상태였다. 줄지어 각잡힌 매트리스와 관물대, 반짝반짝 빛나는 침상와 바닥, 모든 것이 완벽하였다. 분대장은 출입문 윗쪽 틈도 손가락으로 쓰윽 문질렀다. 그러나 우린 미리 닦아놓았다.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분대장~! 곧 2소대를 박살내고 당직사관이 들어왔다.
'소대 차렷~! 3소대 보고~!'
'보고~!'
'이기자! 제 3소대 저녁점호 인원보고! 총원 28 열외 7......'
'드르륵~! 쿠우우웅~♪'
분대장이 당직사관에게 인원보고를 하는 순간, 갑자기 출입문 앞에 있는 세탁기에서 굉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세탁기가 굉음을 내면서 미친듯이 돌아갔다.
점호시간이 되자 각 중대마다 물사용이 중지되었다. 고로 찔금찔금나오던 물이 잘나오기 시작하였고, 세탁기의 물이 적정수준까지 차오르자, 다시 신나게 헹굼모드가 된 것이다. 소대원들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긴장하였고, 나는 그대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당직사관 옆에 있던 당직병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세탁기 쪽으로 다가가더니 거침없이 뚜껑을 열었다. 빨래를 뒤적거리더니 이름이 적혀있는 전투복을 들어올렸다.
'가츠? 상병 가츠? 가츠 일병아니야?'
속으로 제발 우리 소대원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빌던 분대장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침상 맞은편에 앉은 고참들을 나를 죽일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겠구나~!를 느꼈던 순간이다.
당직사관은 기가차서 말도 안나오나보다.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점호를 계속 취하였고, 그렇게 점호가 끝났다. 그리고는 유유히 행정반으로 가셨다. 사실 난 점호가 끝나지 않기만을 바랬다. 2소대장님 저를 버리고 가지마세요~! 제발~! 어흐흑흑ㅜㅜ
그날밤은 유난히도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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