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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츠야 일어나! 가야지!"
"싫어! 더 잘래!"
"엄마 깬다! 얼른 일어나! 돈가스 사줄게!"
"응!"
많은 사람들이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휴일 새벽, 아버지는 어김없이 내 방으로 들어와 몰래 나를 깨웠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이야기이다.
평일에는 누구보다도 일어나기 싫어하시는 아버지였지만, 휴일만 되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셨다. 당시 휴일에는 항상 사진을 찍으러 가셨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더 있지만, 고작 6살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간택을 받지 못하였다. 데리고 가면 오히려 더 짐이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휴일마다 사진을 찍으러 가는 아버지를 무척 못마땅해 하셨다. 가족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아버지가 한번 나갈 때마다 거금이 나가기 때문이다. 전국방방곡곡을 누볐기 때문에 통행료와 기름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시에는 지금처럼 DSLR이 없었다. 지금이야 필름값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찍을 수 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오로지 필름카메라 뿐이었다.
필름값에 인화비까지 취미생활치고는 너무나도 큰 지출이었다. 아마 그때 아버지가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집이 한 채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물정 모르는 나는 그저 좋았다. 아버지를 따라가면 하루종일 드라이브를 하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사진 찍을 동안, 나는 캠코더 촬영을 하였다. 지금도 물론 재밌지만, 어린 나이였던 그 때가 훨씬 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당신때문에 내가 못 살아!"
"하하 다녀올게! 가자 아들!"
그렇게 부자는 어머니의 무한갈굼을 받으며 집을 떠났다. 목적지를 향해 운전하시는 아버지와 조수석에서 전국지도를 펼쳐 놓고, 목적지를 부지런히 찾고 있는 나, 우린 제법 잘 어울렸다. 지도를 한창 보고 있는데, 아버지의 흥겨운 콧노래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같았다.
당시에는 그 기분이 어떤건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훗날 PC방에서 밤새 게임을 할 때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특이하게도 문화재 사진을 찍으셨다. 물론 사람마다 제각각 취향이 다르지만, 아버지는 집요하리만큼 문화재만 찍으셨다.
덕분에 어린 시절, 나는 전국에 있는 유명한 문화재란 문화재는 다 가보았다. 국보, 보물, 사적, 명승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유형문화재부터 정말 이게 문화재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허접해 보이는 곳까지 말이다.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국사 공부를 할 때는 새삼 와닿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직접 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사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다. 뭥미?
"근데 아빠는 왜 문화재를 찍는거야?"
"언제 사라질 지 모르잖아! 찍을 수 있을 때 찍어야지!"
그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작년 숭례문 방화사건을 보면서 아버지가 하신 말이 새삼 와닿았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남들이 잘 찾지 않는 문화재를 더 좋아하셨다. 제대로 관리 감독이 되지 않는 문화재 말이다. 사람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언제라도 훼손되거나 사라질 수 있는 문화재를 열심히 찾아다니셨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동생도 가족여행 삼아 같이 다녔다. 하지만, 지도에도 안 나오는 외딴 곳을 몇시간이나 달려 도착해서는,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탑을 사방팔방에서 찍고 있는 아버지를 기다리기란 여간 많은 인내심이 필요한게 아니다. 그 뒤로는 아버지와 나만의 여행이 되었다.
얼마후, 아버지의 취미가 하나 더 생겼다. 사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영사기까지 구입하였다. 영사기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필름을 위와 같이 만들면, 가격은 몇배로 뛰었다. 어머니의 성화는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렇게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며 시간이 흘러갔다.
중학교를 입학하면서, 어머니는 더이상 나를 보내주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 혼자 쓸쓸히 촬영을 하러 가셨다. 사실 그맘 때, 나도 아버지를 따라 가는 것이 더이상 신나지 않았다.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더 좋았다. 밤 늦게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날 찍었던 필름을 정리하며 나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었지만, 예전만큼 재밌지 않았다.
"아들! 너 변했어!"
"아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그 뒤로 아버지는 더 이상 휴일마다 사진을 찍으러 가지 않으셨다. 사실 지금도 정확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모르겠다. 더 이상 찍을 문화재가 없는건지, 어머니가 밤마다 세뇌시킨건지, 아니면 너무 바빠서 찍으러 갈 시간이 없는건지 말이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많이 변하였다. 필름카메라는 이제 추억이 되었고, 최신 DSLR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얼마전 내가 구입한 DSLR을 보시더니 무슨 놈의 버튼이 이렇게 많냐며 당황해하셨다. 아버지는 늙으셨다.
문득, 나는 서재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보관하고 계신 필름을 꺼내 보았다. 한장 한장 살펴보다보니, 어느새 나는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던 코흘리개 꼬마가 되었다. 한 장의 필름 속에는 16년 전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아름답다!"
그제서야 사진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장의 필름 속에는 단순히 영상만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온갖 추억이 다 들어있었다. 지난 새벽, 휴게소에서 아버지와 함께 먹던 우동, 비포장도로를 달리다가 전복될 뻔한 추억, 원하는 장면을 얻기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시던 아버지의 뒷모습까지 말이다.
나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멋있고, 당당하였다. 각 필름마다 정성스레 작성되어 있는 그의 필체, 아버지는 소중한 추억을 열심히 기록하고 계신 거였다. 갑자기 서재에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수북히 쌓인 필름을 보고 있는 나를 바라보더니 썩소를 날리셨다.
"내가 저 놈의 필름만 보면 혈압이 후우! 확 다 태워야 되는데!"
"얼레? 여기 엄마 사진도 있는데? 앜ㅋㅋㅋㅋㅋㅋ"
"봐봐!"
"우와 엄마 정말 예뻐진 거구나!"
"야야 태워 태워! 모조리 태워! !"
그렇게 필름을 보며, 지난 날을 회상하였다. 요즘에는 휴일에도 너무 바쁘신 아버지, 예전처럼 같이 사진을 찍으러 갈 여유가 없으시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진을 찍으러 가야겠다. 지금 이시간에도 곳곳에 멋진 추억들이 한가득 나를 기다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찍어라!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은 것처럼!
추천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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